

참 작고 작았었다.
지금도 이만큼이나 차이가 나는데 배곯는 게 일상이었던 옛 기억에서는 양 손목이 한 손에 다 들어갈 정도로 마르고 볼품없는 아이였다. 대문을 열고 풍채 큰 남자들을 주렁주렁 달고 들어오던 그 모습이 아직도 뇌리에 선하게 남았다. 금방 사그라들 듯 마냥 덧없게만 보였던, 그리고 실제로 다시 그 사람들에 의해서 잠시간 사라져 버렸던.
선거가 한창이던 시기에 아버지가 보육원에서 데려온 입양아.
후에 그곳에 동행했던 기사가 뒷좌석에 잠들어버린, 어느새 어른이 된 그 기억 속 아이를 보고는 그랬었다. 적당히 애처로워 보이지만 너무 몸이 약해서 골골거리면 골치 아프니까 잘 가려내야 하고, 예쁘고 순하게 생겨서 매스컴 앞에서 카메라 마사지받기 딱 좋을 아이로 골라오라는 명령에 대해서. 마치 스테이크 주문할 때 육질이나 굽기 정도를 따지는 것처럼 그렇게 주문을 넣더라고. 사람이 아니라 마치 물건 고르듯 오늘은 저를 데려갈 양부모가 올까 기대에 차 바라보는 고아들을 주르륵 세워두고 한참을 손가락질하더라고. 도매급으로 팔려 나가듯 골라진 게 아이에게 행운이었을지, 불행이었을지는 아마 지금에 와서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제부터 네 동생이다.’
카게야마는 아무런 표정 없이 아버지와 그를 쳐다보았다. 배다른 형인 시라부를 곁눈질하니 뼈대밖에 남지 않은 아이의 모습이 싫었던지, 아니면 꾀죄죄하게 때 국물 흐르는 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입혀진 고급 천의 헐렁한 셔츠가 거슬렸던 건지 잔뜩 표정을 구긴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도도한 척 구는 시라부가 꼴 보기 싫어 일부러 날을 세웠겠지만 그날만큼은 그의 눈치를 보며 새파랗게 질린 손대신 소맷자락을 세게 붙들었었다. 예전의 시라부와 닮았다는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그 사이 거의 통보하듯 알리고 집을 나선 그는 옆에 아직 허리에도 채 오지 않을 아이를 끼고, 다른 쪽으로는 당당하게 입양 서류를 허공에 펼쳐 들어 제 선행을 온 세상에 알리기라도 할 듯 과장된 몸짓으로 기자들 앞에 섰다. 그리고는 모든 카메라 구멍에 이름이 인쇄단 칸을 들이밀며 이제 이 아이는 ‘히나타 쇼요’라는 걸 선언하듯 목청 높여 소리쳤다.
끔찍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끔찍할지는 가늠조차 되지 않았고.
시라부와 카게야마는 보자마자 질 나쁜 제 아버지가 절대로 사람들의 뇌리 속에 잊히지 않을 아주 특이한 이름을 고르고 골라 선물을 가장한 속박의 끈을 주었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어딜 가나 제 신분을 밝혀야 하는 곳으로 가면 동정심이나 하찮음 따위가 섞인 시선을 마주해야 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 딱 권력에 눈이 먼 돼지 새끼지, 저건. 인간이 아냐.”
“그럼 우리도 인간 새끼가 아니라 욕심 많은 돼지 새끼의 새끼겠네. 기분 더러워.”
“지금에야 잘 키우겠다 저래 놓곤 어디 지하 창고 같은 데나 데려다 놓을걸. 그냥 쓸모 있을 때만 기름진 음식 먹이고 잘 살고 있는 척 마네킹처럼 세우는 게 저 젠장 맞은 개새끼니까.”
“개새끼, 돼지 새끼, 사람도 아닌 새끼. 그냥 하나만 하면 좀 좋나.”
그가 열 살이 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어머니와 제 존재를 무시했던 아버지를 향해 신랄한 평을 하는 시라부는 고작 카게야마보다 한 살이 많았다. 그는 오지도 않을 남자를 기다리며 담배 한 대씩을 꺼내던 어머니가 폐병으로 죽고 난 다음에야 이곳으로 불릴 수 있었다. 전혀 되고 싶지 않았던 대저택의 몇 없는 일원이라는 자리. 켄지로, 너는 좋은 옷 입고, 맛있는 걸 배불리 먹고, 똑똑한 사람들에게 교육받으며 자라거라. 옅은 색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살갑게 쓰다듬던 그녀는 결국 그 자신을 희생하고 깎아먹으며 이 바라지도 않은 자리를 주었고, 시라부는 그녀의 사무치는 외로움과 바람이 어떤 것인지 알았기에 결국 빌어먹을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는 히나타에게서 옛날의 자신을 보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걸지도. 강요받아 들어와서도 결단코 편한 적 없던 이 가시의 성의 새로운 일원이 된 것을 애석하게 여기는 걸지도.
카게야마는 이제 제 이복형에게서 눈을 뗀 채로 적나라하게 나오는 화면 속 이질적인 두 사람의 모습에만 집중했다. 아이는 마치 저가 죄인이라도 되는 듯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얼마나 급했길래 사람들 앞에 서는데 제대로 씻기지도 못했을까. 하긴 섹스 스캔들이 찌라시로 돌아 평판이 최악이었으니 선거 캠프에서 급할 만도 했을 것이다. 카게야마의 시선은 어느 순간부터 까만 떼가 묻어 나와 거뭇해진 셔츠의 목 카라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거슬렸다. 저기서 꺼내와 따뜻한 물로 채워진 널따란 대리석 욕조에 집어넣고는 문대고 닦아 깨끗하게 해주고 싶은 기묘한 욕망이 간절했던 걸 왜였을까.
"그래서, 동생으로 안 받아들일 거야?"
이제 겨우 열 손가락 넘는 나이가 된 아이들은 욕심과 허영에 휩싸여 저들을 돌보아주지 않는 아버지란 작자 덕에 스스로 자라기를 선택했다. 조숙하기 이를 때 없는 모습으로 어릴 때부터 주입되듯 받아온 예절 교육에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완벽하게 허리를 세우고 꼿꼿이 소파에 앉아은 채로 카게야마는 그렇게 물었다.
"그건 우리의 자유가 아니지."
"갖고 싶다고 하자."
"쟤는 물건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갖고 싶다고 해야지. 쟤를 물건 취급해야 우리 곁에 둘 수 있으니까."
까만 눈동자에 기대감으로 가득 찬 이채가 감돌았다. 시라부는 가끔 저 멍청하고 한 길 밖에 모르는 반쪽짜리 동생이 무슨 생각을 머릿속에 이고 사는지 알고 싶다는 의문이 들곤 했다. 너무 깨끗해서 투명한 건지, 아니면 새까매서 구별하는 것에 의미가 없어진 건지를 모르겠어.
그러나 어찌 됐건 카게야마의 말이 맞았다.
쟤를 곁에 두려면 저 얇은 목을 목줄째 쥐고 있는 아버지의 방식에 따라야 했다.
어쩌면 설익은 미숙함이 남은 가슴들이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저 아이만큼은 구해내.'라고.
---
"히나타."
"으응- 오분만 더 잘래."
"너 오늘 공강 아니야, 멍청아."
조금 짙푸른 색의 암막 커튼이 갈라지며 둘둘 이불에 쌓여있던 히나타의 위로 햇빛 직격탄을 날렸다. 토비오오. 애교로도 안 돼. 이미 새빨개진 저 얼굴은 어떻게 하고 그런 말 했으면 믿었을 텐데. 게슴츠레 실눈을 떴던 그가 결국 일어나겠다는 뜻으로 폭신한 이불을 걷어냈다. 이건 또 어쩐 일인지, 어젯밤 나란히 베고 잤던 배게 세 개가 모조리 히나타의 품에서 무참하게 구겨져 있었다. 아마 양 옆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다 일찍 일어나서 텅 비어버리자 킹 사이즈보다도 훨씬 큰 – 좀처럼 없어서 유명 가구점에서 맞춤 제작을 해야만 했다. - 축구장만 한 침대를 점령하듯 맹렬하게 뒹굴었을 게 뻔했다. 이놈의 잠버릇은 어떻게 안 되는 건가. 실없는 생각은 카게야마가 허리를 감싸고 오금에 단단한 팔을 넣어 바로 맞은 편의 천소파에 사기그릇 다루듯 조심스레 내려놓을 때까지도 계속되는 중이었다.
얼른 준비해.
굼벵이 같은 모습에 시라부는 참 고상한 욕으로 활기찬 아침을 열어주고는 부스스하게 떠서 까치집이 되어버린 히나타의 머리칼을 세심하게 정리해주었다. 저 입은 다른 데랑 싱크로율이 너무 안 맞아서 탈이라니까. 조그만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이 돌아다니는지 이미 다 안다는 듯 두어 번 혀를 찬 그는 까만 청바지와 잘 어울리겠다 싶어 얼마 전에 사 온 파스텔톤의 맨투맨 하나를 건넸다. 외투는 나갈 때 줄게. 알았어요, 켄지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는 히나타의 말간 얼굴 위로 짧게 입술이 닿았다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떨어졌다.
황급히 침실을 나서는 제 형들은 어쩜 저렇게 부끄러움이 많을 일인지 모르겠다.
급하게 나서느라 여전히 활짝 열린 채인 문가에서는 달콤한 빵 냄새와 기름과 섞여 더욱 고소하게 느껴지는 계란 냄새가 침실로 넘실넘실 넘어오고 있었다. 오늘도 카게야마와 시라부는 토스트에 스크램블 에그를, 히나타는 노란 그릇에 반쯤 채워진 간장계란밥을.
완벽한 아침의 향으로 가득 찬 그 공간의 편안함에 잠시 취해있던 히나타는 이내 꼬르륵- 꼬르륵- 배고픔을 알리는 정확한 배꼽시계 소리를 듣고는 벌써 복도 끝 저만치에 있는 시라부를 향해 달려갔다.
"같이 가요, 켄지로!"
---
전생에 과로사로 죽은 게 분명해. 그 잠깐 사이에 병든 닭처럼 졸고 있는 히나타를 옆에 두고 아슬아슬할 때까지 기다리던 카게야마가 결국 꽤나 미안한 얼굴로 그를 깨웠다. 어디예요? 다 왔어. 요즘 너 과제가 너무 많아. 쉬엄쉬엄 하라는 말이지만 어느덧 대학 생활을 좋아하게 된 그를 차마 막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냥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귀엽네. 아침부터 뭔 개소리야. 알았어, 알았다구요! 참새가 나무 기둥에 부리를 콕 박아 넣듯 세게 부딪혔다가 금세 떼어낸 그는 짧은 인사를 끝으로 교정을 통과하는 학생 무리들 속으로 사라졌다.
너무 작아서 이젠 안 보여.
그가 없었기에 할 수 있는 걱정을 꺼낸 카게야마가 한숨이 내려앉아 뻑뻑해진 핸들을 억지로 돌려 대로변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어릴 적에 영양 섭취가 엉망이었던 영향이 큰 지 곁에서 저들이 발 동동 구르고 억지까지 써가며 먹였는데도 히나타는 많이 자라지 못했다. 부모님이 작은 걸 수도 있죠, 뭐. 아주 어릴 적에 보육원에 맡겨져 얼굴조차 모른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도 한다 싶었는데, 당신들이 있어서 이제는 그분들 없이도 아무렇지 않으니까 덤덤한 거란 고해성사 같은 말이 돌아왔던 때는 언제였더라. 그때 카게야마는 참 꼴사납게도 울었었다. 그러면 당신이 그렇게 우는 것은 처음 보았노라며 여전히 선함을 간직한 히나타 역시 같이 눈물 바람이었다. 덕분에 벌겋게 부어오른 동생들에게 쌍욕을 해대며 아이스팩을 얹어준 시라부는 덤이었고. 벌써 까마득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그때가 드문드문 떠오를 때면 카게야마는 보석이 세공된 커프스를 괜스레 만지작거리며 처음 만났을 때 예의 그 작고 애달팠던 아이의 잔상을 함께 보았다.
히나타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시라부와 카게야마에게만큼은 그가 선택된 것이 인생 최대의 행운이었다.
---
도대체 어디서 나타나는지 전공 교재를 껴안은 채 후줄근한 차림인 히데오가 히나타를 찾아내 곁에 붙었다. 히나타는 그런 그에게 짧게 인사를 하고는 벌써부터 붐비기 시작하는 강의실을 향해 걱정스러움과 조급함을 함께 실어 열심히 발을 놀리는 중이었다. 출석 점수에 가산점 받으려면 무조건 앞자리 사수가 필수인 교수였으니까.
"근데 넌 진짜 형들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겠다."
"봤어?"
"당연하지. 그 비싼 차를 타고 오는데 보기 싫어도 보이더라. 그나저나 진짜 너 형들한테 좀 민폐 아니야? 매일 깨워주지, 밥 먹이고 차 태워서 안전하게 학교 모셔다 주지, 중간중간에 확인 전화 걸게 만들지. 거기다 하교할 때도 뒤풀이 끌고 가려는 선배들한테 술 박스에 돈까지 찔러가며 너 바로 데리러 오잖아."
"그렇네. 토비오도 켄지로도 바쁜 사람이니까."
그래, 이 세상에 그 따위로 동생 챙기는 형들은 없다고. 중얼중얼. 그러다가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상하게 다른 주제로 넘어간 그는 이 교수가 지난 학기 프레젠테이션 과제 때 얼마나 짠 점수를 줬으며,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학생들을 울렸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벌써 개학한 지가 한 달이 넘었는데, 질리지도 않는지 매번 다른 스파이스가 추가되는 괴담은 이제 거의 도시 전설 수준으로 부풀려져 있었다.
제 형제들과 있을 때면 재잘재잘 퇴근하고 들어온 부모를 반갑게 맞이하는 어린아이처럼 말이 많아지곤 하던 히나타는 턱을 괴며, 여전히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떠벌리는 히데오의 보조개가 잡힌 볼 쪽으로 시선을 둔 채로 가만히 그 말을 듣다가 띠링- 하는 짧은 알림음에 액정으로 시선을 옮겼다. 수업 시작 얼마 전, 교수가 앞문을 열었지만 나이가 들어 행동이 많이 느린 사람이었기에 방금 도착한 두 개의 문자 메세지에 지체 없이 답을 주는 데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야, 집어넣어. 히데오의 걱정에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린 채 예의 보기 좋은 미소를 만들어냈다. 내 수업에는 휴대폰 금지예요. 경고성 멘트가 나가고 이내 커다란 스크린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전부 다 아날로그 같으면서도 수업은 꼭 저걸로 하다니 신기해. 무엇이 그렇게 다 궁금한지 잡담으로 벌점이 먹힐까 귓속말로 슬쩍 속삭이던 히데오는 까만 글씨들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열심히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역시 악덕 교수의 힘은 위대하구나, 저 쉴 틈 없는 모터를 단박에 멈출 정도면. 히나타 역시 아까 만들어낸 얼굴을 전혀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로 앞을 바라보았다. 절대 이는 드러내지 않게, 절대 속의 것들은 보이지 않게.
그건 카게야마와 시라부가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 말은 사실이다.
히나타 쇼요는 카게야마 토비오와 시라부 켄지로가 없다면 단 일초라도 살 수 없을 것이다.
---
들어오자마자 지키고 서있던 저보다 한참은 큰 형들을 몰래 곁눈질하기만 반복하던 아이는 조금 거칠게 잡아오는 손아귀의 힘에 깜짝 놀라 그 잠깐 새에 눈물을 대롱대롱 매달고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바싹 마른 몸에서 끈적한 술내가 풍겼다. 저걸 끼고 자랑하러 다닌다고 접대하는 자리까지 데려나갔던 모양이다. 카게야마는 침실에 대자로 퍼진 채로 자고 있을 제 아버지의 탐욕에 진심으로 기분이 더러워졌다.
제발 괴롭히지 말아 주세요. 고아원은 지켜줄 만한 어른들이 없었고, 뭐든지 다 부족했다. 그런 곳에서 인간은 아주 쉽게 가장 밑바닥의 치부를 드러냈고, 그래서 숨길 것 없이 솔직한 감정을 가장 잘 드러내는 그곳은 히나타에게 항상 위협적인 장소로 자리 잡았다. 조금만 작고 여리면 빼앗기고, 덩치가 크고 매서운 눈매를 타고나면 당장에 위협할 생각만 하는 아이들이 가득한 곳.
입양이 결정되고 몇 번이고 복수하듯 매섭게 날아드는 발길질 세례를 받아내던 히나타는 이 사람들 역시 그러겠거니 잔뜩 겁에 질린 채였다.
"괜찮아. 어서 이리 와."
벌써 변성기가 온 것인지 조금은 탁하고 낮은 음성에 안심이 되는 것은 왜였을까. 히나타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한 마디 정도 더 큰 어른 같은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다른 한쪽에는 조금 덜 커서 덜 위협적인, 하지만 지나치게 시리게 생긴 소년이 곁에 붙었다. 작고 허름한 창고 따위를 생각했던 그가 이끌린 곳은 옅은 베이지색과 푸른색 계열의 타일이 옹기종기 붙여진 깔끔한 욕실이었다. 그리고 조금 오른쪽에 위치한, 가끔 틀어주던 영화에서나 보던 욕조가 저를 맞이하기라도 하듯 따끈한 김을 모락모락 피워내며 자리하고 있었다. 들어가. 어쩔 줄 몰라 가만히 떨기만 하던 히나타의 셔츠와 바지를 하나 둘 벗긴 시라부는 죽은 사람처럼 - 마치 제 어머니처럼 - 흉하게 올라온 뼈들의 윤곽을 슬쩍 쓰다듬다가 그의 위로 놀라지 않게 미온한 물을 뿌리며 조심스레 씻겨주었다. 카게야마는 조금 떡져서 뭉쳐있지만 윤기가 흐르는 주황색 머리칼을 이리저리 만져대다가 드디어 물에 들어가는 히나타의 곁에 앉아 미리 띄워둔 노란색 오리들을 그의 눈 앞에 장난스레 내밀었다.
네 거야.
이게요?
마음에 안 들어? 그럼 새 걸 사줄게.
아니, 아니요. 하지만 내 거는 아무것도 없는데.
이제부터는 전부다 네 거 해줄게. 그러니까 너는 우리 옆에 꼭 붙어있기만 해.
지금은 움푹 꺼졌지만 살이 오르면 분명 귀여울 그것을 소중하게 매만지던 카게야마가 어색하게나마 웃었다. 하도 움직이지 못한 근육이 갑자기 무슨 일이냐며 아우성이었지만 여전히 경계하듯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만 살짝 들어 올린 히나타를 최대한 안정시켜주고 싶어서였다.
하하하- 수증기로 가득 채워졌던 욕실이 윙윙 울려댔다. 그는 방금 제가 뭘 한 걸까 싶어 입을 꾸욱 막았지만 이내 손쉽게 그것들을 떼어버리는 시라부에 다시금, 아까보다는 한층 옅은 웃음꽃을 피워냈다. 왜? 그냥, 너무 어색해 보여서... 아아, 그런 뜻이었구나 싶은 카게야마는 좀처럼 기쁜 일이 결여된 이 불행의 저택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네가 왔으니 조금은 달라질까. 기분 나쁘기보다는 조금 멋쩍어하는 카게야마의 앞으로 불쑥 다가온 그가 항상 밑으로 처져있는 양 꼬리를 조심스럽게 말아 올리며 이렇게 하면 괜찮아요, 위로하듯, 아니면 사과하듯 부드럽게 매만졌다.
역시, 닮았어.
카게야마와 시라부의 눈길이 서로에게 닿았다. 단순히 서류 상의 동생이 되어서가 아니었다. 다른 녀석이 왔다면 아마 두 사람은 그런 것 따위 되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히나타는 자신들을 많이 닮았다. 있어봤자 짐이었을 부모들에게 어릴 적부터 버려졌고, 혼자 밖에는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외로움으로 몸을 떨어보았으며, 그러나 곧 형제가 생겨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각인하듯 선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를 완벽하게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 역시도.
그들은 그렇게 두 사람에서 세 사람이, 결국에는 하나가 되었다.
---
"어이 히나타. 오늘은 어떻게 안 되냐? 선배들이 너 끌고 오면 회비 공짜라고 공약 내걸었던데."
아직 다른 수업이 남은 히데오와 헤어져 곧 학교에 도착할 시라부를 기다리고 있던 히나타는 나쁜 의미로 꽤나 익숙해진 얼굴이 다가오자 불쾌함을 애써 감추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자꾸 제 곁으로 와 어떻게든 치근덕거리는 게 기분 나쁜 사람이었다. 오늘은 어깨동무. 지난번처럼 손이라도 잡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라면 다행인 건가. 물론 혐오스러울 정도로 엿 같은 감각을 재빨리 치워내야겠다는 다짐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선배들과의 술자리 핑계를 대면서 자꾸만 데려가려는 그를 어떻게 뿌리쳐야 좋을까 곰곰이 고민하던 히나타는 그 고민이 헛된 것이었다는 걸, 어깨를 잔뜩 짓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진 순간에야 알았다.
“켄지로. 토비오도 같이 왔네요?”
둘 다 요즘 바쁘다더니. 모처럼 일정이 맞았는지, 아니면 히나타에 한해서는 무한한 안테나가 서는 건지 알 길 없으나 살았다는 안도감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제 동생에 관해서는 물불 안 가리는 걸로 유명한 형들이 쌍으로 나와줬으니 더는 건드리지 않을 줄 알았지. 하루 종일 가면을 쓰고 있느라 너무 피곤했고, 쿵쾅거리며 동요하는 심장을 가까운 선배에게 들키기가 싫었으며, 얼른 그들의 따스한 오후의 햇살 향이 풍기는 품에 안겨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갑자기 잡힌 가방끈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텐데.
"저기요, 형님들. 벌써 다 큰 애를 아무리 동생이라지만 그렇게 극성으로 싸고돌면 좀 그렇죠."
"선배, 저기 그만 놔주실,"
"오늘 하루만 히나타 좀 빌릴게요. 금방 들여보낼 테니까 괜찮죠?"
나름 무리한 부탁을 한다는 듯 허리를 반 정도 숙여 보였는데, 그 어정쩡한 태도가 더 질 나빠 보였다. 일이 커질 것 같은데. 히나타는 벌써부터 쎄한 기운을 풍기고 있는 시라부와 당장에라도 주먹을 날릴 듯 힘줄을 새우고 있는 카게야마에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선배, 저 오늘 컨디션이 별로라서요. 에, 후배님 내가 겨우 허락 맡았는데 빼는 거야? 그러지 말고 가자고. 도저히 말이 먹히지가 않는 사람. 아니, 사람은 무슨. 그냥 하반신으로만 사는 양아버지를 닮아 돼지 새끼, 개새끼였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 끈질긴 것까지 어쩜 저렇게 판박일까. 대충 돈 쥐어주고 술 박스째로 배달해주면 먹히는 쪽은 아마 술자리가 목표라서 금세 떨어져 나갔겠지만 이 인간은 딱 봐도 목적이 달랐다.
지난해에 같이 수업을 들었던 미나토가 몇 번인가 팔뚝이나 목 뒤를 긁길래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저 선배, 널 먹잇감처럼 보고 있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남기고는 빨리 가자고 채근한 적이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같은, 불순한 의도가 다분한 의미와 온도의 시선. 성미 급한 짐승이 일 년을 참은 거면 확실히 끈질기게 기다리긴 했네. 히나타는 아직까지 메달고 있는 그 징그러운 손을 떨쳐내기 위해 몇 번이고 힘을 주었고, 눈 앞의 두 사람과 대치하느라 저도 모르게 힘을 풀고 있던 그에게서 벗어나는 건 예상대로 꽤나 손쉬운 일이었다.
"... 자국 났네."
"얼른 집에 가고 싶어, 토비오."
"저기 너 자꾸 빼다가 진짜 왕따 되는 수가..."
근데 우리 쪽 맹견은 당신처럼 오래 억누르는 것 따위는 전혀 못하거든. 늦은 오후의 교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져나가 한산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비어있는 것도 아니었다. 몇몇 남아있던 학생들이 벌써 스마트폰을 켜고 꼴불견스럽게 넘어진 남자의 우스꽝스러운 흑역사를 담아내는 중이었다. 웅성거림을 눈치챈 건지 순간 독하게 변한 눈빛은 날이 잔뜩 서있었지만 그런 것 따위 아무것도 아니게 맞받아칠 사람을 셋이나 두고서는 전혀 소용없는 앙탈 따위 밖에 되지 않았다. 가자- 몰래 구둣발로 누런색 컨버스화를 짓누르던 시라부의 말을 뒤로 히나타가 쓰러져 있는 선배에게 도와주겠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역시, 저 과보호에 너도 숨 막혔었구나. 그렇게 말하는 듯 의기양양한 꼬락서니가 참 우습네. 당장에 달겨들어 두들겨 팰 것 같았던 두 사람은 이번에는 아무런 표정도 띄우지 않은 채 그저 조금 멀어진 작은 등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틈에 빠져나가면 될 것 같은데.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며 그 손을 잡을 생각이었는데, 히나타는 그 멍청하고 부질없는 기대를 산산조각 내듯 다정하게 내민 배려를 허상과도 같게 금세 거둬들였다.
"뭐, 뭐야."
"선배. 다른 사람들이 우리 형들 보고 다들 너무 심한 브라콘이라고 놀린다면서요. 그래서 정의의 기사 흉내라도 내러 온 거예요? 불쌍한 동생 구출 작전, 뭐 그런 거? 근데 이를 어째. 저 사람들한테 내가 필요한 거보다 그 반대가 훨씬 커서 말이야."
"... 너,"
"다시는 이따위 짓거리하지 말아요.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싫으면."
반쯤 앉은 채로 몸을 일으킨 남자의 가랑이 사이에 사뿐히 자리한 히나타가 귓가에 달콤한 음성으로 속살거렸다. 꺼져, 개새끼야. 허리를 조금 굽혔던 그가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제 몸을 일으키고는 마치 오물을 만진 듯, 아니면 대단히 재밌는 무언가를 봤다는 듯 탁탁 털어내는 건지 박수를 치는 건지 모를 행위를 서너 번 반복하고는 아무런 일 없었다는 듯 돌아섰다.
"너, 아니 너네, 미친 거 아냐?!"
"응, 아주 예전부터. 그래서 어쩌라고."
단 한 점의 거짓도 없다는 듯 내뱉어진 답은 그저 지나치게 가벼웠으며, 한편으론 지독하게도 무거웠다. 그 모순적인 무게감에 짓눌려 어떻게 할 줄 몰라 낑낑대는 남자에게서 완벽히 돌아선 히나타는 저를 기다리고 있는 품들을 향해 달려갔다.
자연스럽게 허리를 휘감는 뱀 같이 매끄러운 행위. 그것이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해, 마침내 침대 앞까지 같을 때 어떻게 변할지는 눈을 감지 않아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저딴 건 모두가 입 모아 말하듯 아주 특이하게 끈끈한 형제애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가장무도회에서 쓰는 가면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화려한 문양의 겉포장이었다. 누군가가 발견한다고 해도 적당히 발을 뺄 수 있게, 곤란하지 않게 하기 위한 서로를 향한 배려.
그러나 방금의 그 감정은 숨겨지지 않은 날 것이었다. 붉게 쳐진 커튼 너머로 보이는 축축하고 음침한 진정한 속내.
사랑을 하는 눈이었다.
감히 우리 사이를 건드리지 말아라 하는 타들어갈 듯 매서운 경고였으며, 그 모든 건 충동적이게 나온 게 아니라 차가운 이성이 이미 이해하고, 허락한 일이라는 듯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건 하루 이틀만의 것이 아니었다. 몇 년이고, 어쩌면 몇십 년이고 쌓아져서 이미 다른 사람이 뚫고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할 아주 견고한 성벽 따위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으니까. 미쳤다, 그러니까 더 미친 거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형제라는 굴레는 마치 그저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내버리고 스스로 만들어낸 이반의 공간에서 서로를 만지고, 훑고, 탐내고. 그런 비이상적인 것들이 마치 정상이라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굴고 있는데 저게 돈 게 아니면 대체 뭐냐고! 온통 복잡하게 떠나지 않는 생각들로 멍청한 표정을 지어내는 그를 창 너머로 바라보던 히나타가 피곤한 듯 저를 위해 조금 낮게 내려준 어깨를 지지대 삼아 기대고는 시원한 향이 나는 무르익은 어른의 손을 제 눈가에 얹어두었다.
"멍청하네."
그건 누구를 향한 말이었을까. 운전대를 잡은 기사는 생전 못된 말이라곤 쓰지 않는 히나타에게 짧게 시선을 두었지만 그것뿐이었다. 두 도련님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힘없는 제가 뭘 할 수 있을까. 늘어난 한숨이 차 안을 채웠지만 신경 쓰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벌레가 꿈틀거리듯 징그러운 감각이 가득 찼던 온몸이 이내 익숙한 향과 체온에 조금씩 안정된 숨을 되찾았다. 괜찮아? 콧잔등에 살짝 버드 키스를 한 카게야마가 아까와는 달리 잔뜩 풀어진 표정으로 어느덧 살이 올라 보드라워진 두 볼을 감쌌다. 처리해버리고 싶은데. 아까부터 곁에서 욕지거리를 중얼거리고 있던 그가 짧게 원하는 것을 내비쳤지만 결국은 히나타의 허락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밖에 나가면 전부 다 원하는 데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들 하찮게 여기는 저에게만은 그렇게 어렵게 굴었다. 그건 작은 생채기라도 내는 게 싫은 그들의 진심이었고, 평생을 자신들의 것으로 곁에 있어달라는 영원의 애원이었음을 히나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켄지로 마음대로 해요. 비밀 이야기를 하듯 작게 속삭인 그가 언젠가 함께 하자고 졸랐던 증표 같은 다이아몬드 피어싱을 귓바퀴와 함께 슬쩍 물었다. 여긴 좀 곤란한데. 학의 그것같이 가늘고 위태로운 목에 작게 흔적을 남기던 카게야마가 푸스스 웃으며 들썩이는 그의 고개를 돌려 한참 입술을 물다가 돌려놓았다. 차의 진동이 완전히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얼른 가요, 우리. 오늘은 왠지 처음 닿았던 그곳과 많이 닮아 따스한 색감의 타일이 단정하게 깔린 욕조 위가 좋았다. 지금도 둥둥 떠다니고 있을 오리와 함께 처음으로 가져보는 것이 이 사람들이란 게 마냥 좋았을 뿐이었다. 형제이건, 연인이건, 무엇으로 불리건.
우리가 서로에게 유일한 존재이며 서로만을 사랑하고 사랑받을 하나의 존재라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까.
서두르자 채근하는 히나타는 저를 한가득 감싸는 단단한 품들에서 어여쁘게 피어난 성년의 꽃처럼 완연한 미소를 피우고 있었다.
---
'근데 넌 진짜 형들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것 같다.'
그 말은 거짓이다.
카게야마 토비오와 시라부 켄지로는 히나타 쇼요가 없다면 단 일초라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