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우시, 코우시.”
제 연인의 부름에 작업하고 있던 걸 멈추고 뒤돌아본 스가와라의 눈 밑이 퀭해 잘못 건드렸다간 저승길로 직행할 것만 같아 히나타가 숨을 헙하고 삼켰다. 고등학교 교사 일이 많이 고된 모양인지 새벽 두 시가 넘어서 제 연인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 배라도 채워주고자 야식을 가져왔건만, 커피가 담겼을 게 분명한 종이컵이 찌그러지고 구겨진 채로 책상 위에 가득 올려진 모습이 히나타의 시야에 들어왔다.
“코우시 배고플까 봐 오늘 낮에 사 온 샌드위치랑 커피인데. 안 되겠다. 우유로 가져올게요. 코우시는 좀 자야 해.”
“커피로 괜찮아. 카페인 들어가도 잠은 잠만 자는걸.”
건네받은 접시와 컵을 책상 위에 올려 두려던 스가와라는 눈에 들어온 수많은 종이컵을 보고 아, 들키면 안 되는 걸 들킨 듯이 히나타의 눈치를 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그게 잘 자는 사람의 몰골이냐 되묻고 싶은 걸 꾸욱 참고 있다는 게 쓰여 있어서, 스가와라는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눈을 잠깐 누르더니 이내 히나타의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푹신푹신한 게 기분이 좋다며 연애를 하기 전에도 자주 했던 버릇이었다. 또 또 이렇게 피하려 하지. 피이, 입술을 삐죽 내밀자 그는 히나타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내가 걱정시키기만 하네. 그래도 얼마 안 남았어. 아마도 내일이면 급한 일은 마무리가 될 것 같아. ……못 믿을 눈으로 보지는 말고. 이리 와, 쇼요.”
미안해. 스가와라는 히나타의 팔을 잡고 제 품에 들어오도록 그를 가득 안았다. 또 고마워. 새벽까지 일하는 자신을 위해 샌드위치와 커피를 준비해준 것만 해도 예뻐 죽겠는데, 품 안에 얌전히 안겨 주는 제 연인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막 고등학교로 발령받은 신입 교사를 말려 죽일 심산인지, 밤을 새워도 좀처럼 끝나지 않는 일을 주는 직장이 밉다가도 주머니에 있는 사직서를 내밀지 못하는 이유는 제 품에 안긴 히나타 때문이었다. 내가 먹여 살려야지, 누가 먹여 살려. 스가와라는 히나타의 푹신푹신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눈을 감았다. 잠자코 그가 만지는 대로 있던 히나타는 제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이 사라지자, 고개를 슬금슬금 들어 지친 듯이 눈을 감은 스가와라의 얇은 머리카락을 살살 어루만졌다.
“편하게 침대 가서 자요.”
오랜만에 히나타의 손길을 느끼고 있자니 눈꺼풀이 무겁다. 커피를 마셔도 잠은 잘만 온다니까. 스가와라가 히나타의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올리며 볼을 감싸 쥐었다.
“오늘 할 일은 오늘 끝내고 자야지.”
“그치만 코우시 눈 밑이 퀭해.”
“나, 나 지금 많이 못 볼 꼴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스가와라의 머리카락이 히나타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제 어깨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그럴 리가 없다고 하라는 말에 아무 말 하지 않고 등을 가만 토닥이고 있자, 거울을 찾기 시작하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또 귀여워 그는 스가와라의 볼에 입을 쪽 맞췄다.
“영양제 제대로 먹고 있죠?”
“응.”
“밥은.”
“밥도 제대로 먹고 있어. 하아, 이건 내가 물어봐야 했던 건데.”
“내가 언제 밥 굶는 거 본 적 있어요?”
“아니, 영양제.”
“그건……, 좀 이따 먹을 거예요.”
지금 몇 시? 스가와라의 말에 새벽 세 시! 히나타가 답했다. 발랄하게 대답하라는 게 아닌데. 스가와라가 그의 이마에 꿀밤을 꽁 소리가 나게 때렸다. 영양제를 사면서 하루에 세 알씩 꼬박꼬박 먹기로 약속했으면서. 감기에 걸려 비실비실거리면서도 약을 먹지 않으려 하는 히나타를 알기에,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아침 점심 저녁에 한 알씩 멀으라는 메모를 써 냉장고 앞에 붙여두기까지 했는데 여태 안 먹고 있다 눈치를 슬슬 보더니 이제야 먹겠다는 말을 꺼낸다. 그러는 와중에도 베시시 웃는 게 제 연인이라 참 예쁘다.
“코우시가 옆에 있을 때는 맨날 챙겨 먹었는데.”
“내가 옆에 있을 때만 꼬박꼬박 챙겨 먹잖아.”
“치이, 정말 내일이면 일이 마무리 되는 거 맞아요? 그럼 이제 내 옆에서 챙겨 먹으라고 말해주면 되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도쿄로 올라와 스가와라와 함께 동거를 하게 됐는데, 어떻게 된 게 함께 살면서도 서로 떨어져 지내 연애를 했던 때보다 얼굴을 보기가 힘이 드는지. 신입 교사를 잠도 못 자게 괴롭히는 학교의 잘못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속상한 건 어쩔 수가 없어 히나타의 입술이 삐죽 튀어 나왔다. 그걸 본 스가와라가 그를 달래주기 위해 아랫입술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내일 오랜만에 외식할까?”
“정말?”
“응, 정말. 내일 퇴근하면 외식하기 딱 좋을 시간일 것 같거든.”
“좋아요! 완전 좋아요. 우리 외식하는 거 두 달만인 거 알아요? 뭐 먹을래요? 내가 예약할게요.”
누가누가 제 잘생긴 연인의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놨나.
매끈매끈해서 만질 맛이 났던 그의 흰 피부는 푸석푸석해졌고, 눈 아래에 콕 박힌 눈물점이 매력적이었던 그의 눈가는 광대까지 내려오는 다크써클로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
보양식을 먹여야 했다.
“장어 어때요? 장어 덮밥도 있고……. 어디보자, 자라탕 같은 것도 괜찮은데. 아, 나베도 있다!”
히나타는 몸에 좋다고 들은 음식이란 음식은 줄줄 읊어대고는 스가와라에게 하나 골라보라며, 씨익 웃었다.
이게 다 신입 교사에게 당근은 주지 않고 채찍질만 해대는 학교 때문이었다. 밥은 제대로 먹고 있는지 걱정이 돼서 스가와라에게 보양식을 먹이고자, 괜찮다는 식당까지 예약했는데.
“미안해. 정말 미안해, 쇼요.”
“괜찮아요. 중요한 일이라면서요. 코우시가 걱정이지. 코우시는 괜찮은 거예요?”
“나는 괜찮아. 있잖아, 쇼요. 저녁은 다음…, 아! 가봐야겠다. 이따 전화할게.”
누군가 다급하게 스가와라를 찾자, 그 또한 다급하게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스피커 너머의 시끄러운 소리는 오늘이면 일이 마무리 될 것 같다고 했던 스가와라의 말과는 전혀 다르게 들렸다. 새벽 내내 노트북을 붙잡고 끝나지 않은 업무를 하고 있는 스가와라를 보고 샌드위치나 커피 따위를 주고 침대에 눕는 히나타의 마음은 편하지 않다. 시간이 부족해 쫓기고 있는 스가와라를 도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잘하는 거라고는 운동밖에 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방해하지 않는 게 전부라 힘들어하는 연인을 보고도 손을 쓸 수 없다는 게 참 속상했다.
오늘은 또 몇 시에 돌아올까.
오늘 저녁도 혼자서 먹을 게 분명하건만 히나타는 스가와라에게 해줄 보양식 레시피를 검색했다.
“아, 진짜. 나는 요리를 하면 안 되겠다.”
블로그 레시피대로 닭죽을 끓이던 히나타는 자신이 방금 넣은 게 소금이 아닌 설탕이라는 걸 알고 뒤늦게 소금을 넣으려 하니, 닭죽 위에서 소금 눈이 내렸다. 안 돼, 안 돼! 소리를 빼액 지르며 아직 녹지 않은 부분을 숟가락으로 뜨려다 아주 휘젓고 말았다. 차라리 보양식 식당에서 닭죽을 포장해올걸. 국물을 아주 살짝 맛본 히나타는 난생처음 맛보는 괴로운 맛에 설탕을 탁탁 뿌렸다.
“달고 짠 닭죽 하지 뭐. 요새는 단짠단짠이 맛있댔어.”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러나 스가와라는 밤 열한 시가 넘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그게 열두 시, 한 시, 계속해서 시간이 흐르자 졸음을 참을 수 없던 히나타는 침대 옆의 빈자리가 유독 쓸쓸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제대로 잘 수 있을까, 힘들게 잠에 들었건만 그가 눈을 뜬 건 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는 아침이 아닌 새벽이었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니 새벽 다섯 시가 되기 딱 오 분 전이었다. 침대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또 서재에서 노트북을 붙잡고 업무를 보고 있는 건지, 또 단합이다 뭐다 회식이 잡힌 건지. 이렇게 고생시키는 걸 보면 노동청에 신고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하아, 한숨을 한 번 쉬고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부엌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코우시? 방 안에 들어오질 않고 뭘 하는가 싶었다.
“코우시, 이제 들어오는 거예요?”
“나 때문에 깬 거야?”
“아니. 그냥 잠이 안 와서…, 아 코우시! 그거 먹으면 안 돼요!”
닭죽을 깜빡했다. 보자기를 덮어두긴 했지만, 실온에 오래 놔두는 바람에 상했을 게 분명해 손을 뻗어 먹는 걸 막으려 했건만 스가와라는 식탁 위에 놓인 닭죽을 숟가락으로 떠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다 목을 꿀꺽였다.
“고마워.”
“그거 맛없는데…….”
소금을 들이붓고, 그걸 무마하기 위해 또 설탕을 잔뜩 집어넣은 말 그대로 단짠단짠 닭죽을 스가와라는 맛있다며 또 한 번 입에 떠 넣었다.
“그거 밖에 오래 놔뒀던 거고. 코우시가 이렇게 늦게 올 줄은 몰라서, 아니 탓하는 게 아니라. ……맛도 없는데, 왜 먹고 있어요 그걸! 씨이.”
평균에도 못 미치는 실력으로 닭죽을 끓였던 건 그저 스가와라가 좋아해 주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보양식이라고 요리하기는 했지만, 자신이 생각해도 엉망인 요리를 그에게 먹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좋아해주기를 바랐을 뿐. 그리고 그는 제가 만든 요리가 소금과 설탕 범벅인 최악의 맛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위해 만들어준 게 아니냐며 머리를 쓰다듬어줄 사람이었다.
봐라, 지그도 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지 않나.
스가와라는 그런 사람이었다. 항상 자신보다 제 연인이 우선인 사람. 히나타의 코끝이 찡하고 울리더니, 붉어진 눈시울에서 결국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이게 뭐야. 일을 끝내고 고된 몸을 이끌고 돌아온 집에서 자신보다 먼저 자고 있는 연인을 위해 스가와라가 살금살금 걸어 다니는 것도 서러웠고, 서재에 미처 정리하지 못한 서류와 몸에 좋지 않은 인스턴트 커피가 들었던 종이컵이 쌓여있는 것도 서러웠고, 이유도 말하지 않고 울고 있는 제 연인을 달래기 위해 놀란 얼굴로 뛰쳐와 품 속으로 끌어당기는 것도 서럽기 짝이 없었다.
“울지 마, 응?”
“……왜 이렇게 늦게 왔어. 흐윽, 끕.”
“미안해. 내일부터는 일찍 올게. 내 쇼요 뚝 하자, 뚝.”
“약속이야?”
“응, 약속이야. 새끼손가락 걸고 엄지손가락으로 도장도 찍자.”
토닥토닥. 울음을 달래기 위해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조심스럽고 또 다정했다. 히나타는 그가 자신을 달래면 달랠수록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며 어리광을 피웠다.
“약속한 거예요.”
스가와라가 예쁘게 웃었다.
*
“그래서 하기로 했어.”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건데.”
“너 이런 거 많이 알잖아. 나는 모른단 말이야.”
뇌물로 사다 바친 커피를 빨대로 쪽쪽 빨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하기는 없다? 대학에 와서 사귀게 된 동기는 히나타의 연애 사정을 억지로 듣게 되고서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밥 사줄 테니 나오라는 연락에 부리나케 달려왔더니, 지금부터 돈을 모아야 할 일이 생겼다고 커피 한 잔으로 괜찮겠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이게 뇌물이란다, 뇌물.
“그러니까 네 연인이 피곤하고 힘든데도 널 생각해주는 마음이 갸륵하셔서, 너가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뭘 해줘야 할지 잘 모르겠다. 뭐, 이 말이지?”
저러다 고개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는 히나타의 반응에 흐응, 동기는 흥미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이벤트라면 역시 누드 에이프런이지.”
“누, 누드 에이프런? 너 미쳤어?”
“직장인을 위한 특별한 이벤트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는데 이만한 이벤트도 없다니까. 다른 거 생각할 게 뭐 있어. 당연히 누드 에이프런인데. 로망은 에이프런과 같다는 말 몰라?”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딨어!”
“얘가 얘가 세상 다 살아보지도 않고 그 말을 하네.”
이 세상의 말을 전부 알고 있는 것도 아닌데 로망은 에이프런과 같다는 말은 없을 거라고 단언하는 건 아닌 것 같다는 동기의 말에 히나타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미안, 내가 실언했어. 하지만 미심쩍다는 눈빛은 풀지 않았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해. 히나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래도 누드 에이프런은 좀 망설여지는데.”
“음, 그럼…. 아, 너 연인이 교사라고 했지? 그럼 좋은 게 하나 있다.”
동기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히나타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걸 들을 수 있을까. 히나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입가에 귀를 가져다 댔다.
“……에이프런.”
발렌타인이라든가, 크리스마스라든가, 뭐 일종의 연인을 위한 날이라고 할 수 있는 기념일에 선물을 준비한다든지, 이벤트를 구성한다든지의 꽤 설레는 행동을 하기에 그때의 히나타는 연애를 처음 하게 된 고등학생이었다. 인생에서 이벤트라 부를 수 있는 날은 경기 당일이었으니, 연애에 숙맥일 수밖에. 그래도 나름 찾아본 건 있었는지, 발렌타인 데이에 제 연인인 스가와라에게 선물할 초콜릿을 사기 위해 수제 초콜릿 가게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물론 찾아만 갔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문 앞에 발자국만 가득 남긴 채 돌아간 히나타는 편의점에서 산 초콜릿을 직접 건네주지 않고 사물함에 몰래 넣어두었다. 초콜릿을 받은 스가와라는 히나타의 귀 끝이 붉지 않았더라면 제 연인이 준 초콜릿이란 것도 몰랐을 거라 말할 정도로, 그래 그 정도로 숙맥이었다.
그런 숙맥 히나타도 성장을 한다. 스가와라와 히나타는 할 거 다 하고 볼 거 다 본 연애를 했다. 스가와라가 입술을 맞춰 오면 목에 팔을 두른다든가, 허리를 다리로 감싼다든가 꽤 대담한 행동을 하는 히나타에게 숙맥이란 말은 이제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힘들고 지친 제 연인을 위해 좀 더 무모할 정도의 담력을 가지고 행동할 자신이 있었다.
그래도 누드 에이프런은 좀 무리.
대신 동기로부터 아주 좋은 정보를 듣고 왔다. 단어를 들었을 때만 해도 침이 꼴깍 삼켜졌다. 옷을 온전하게 입고 있으면서 직장인의 몸과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이벤트라니.
“걔는 천재야.”
분명 여기다 뒀을 텐데. 졸업 후에 스가와라가 함께 동거를 하게 되면서 집에 있던 물건의 대부분을 함께하는 집으로 옮겼다. 그러니 이벤트를 위한 준비물도 있을 터. 히나타는 잘 쓰지 않는, 지금은 창고 대용으로 쓰고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불을 켰다. 여기로 이사 온 지도 오 년이 넘어가는데, 공간 부족으로 인해 미처 풀지 못한 짐들이 한 가득이었다. 히나타는 제 이름이 써진 상자를 한 켠으로 옮겨놓고 그 위에 붙어있던 테이프를 떼기 시작했다. 찌지익. 이럴 줄 알았으면 겉면에 뭐가 들었는지 써 놓을걸. 상자를 세 개쯤 열어봤을 때 히나타는 제 어깨를 두드리며 입술을 뾰루퉁하게 내밀었다. 아니지, 아니야. 그래도 이벤트를 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히나타가 다음 상자를 뜯고 안을 확인하니, 그토록 바라던 게 들어 있었다.
“그래! 이거지.”
이거. 그러니까 이거. 새까만 천 쪼가리. 히나타는 제 손에 들린 옷을 보면서 뿌듯해 보이는 얼굴로 웃었다. 이게 얼마 만이더라. 졸업하고 바로 상자에 담아뒀으니까. 히나타는 제가 졸업한 카라스노 고교의 교복을 들고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입학하면서 교복을 샀는데 어째 교복이 작아 새로 사는 일 없이 삼 년 내내 입었던 교복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에서도 입으면 딱 들어맞을 것 같은 느낌에 괜히 입안이 쓰렸지만, 지금은 입을 수 있어 다행인 것 같기도 했다.
“딱 맞네. 오늘을 위해 입으란 것처럼 딱 맞는 이 핏! ……좀 작아도 될 텐데.”
그새 교복으로 갈아입고 온 히나타는 거울 앞에서 몸을 이리저리 돌아보며 교복을 입은 제 모습을 확인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제 단추에 이내 실실 웃음을 지었다. 심장에 가깝다는 두 번째 단추는 교복에 달려있지 않았다. 졸업과 동시에 도쿄에서 미야기로 날아온 스가와라는 제게 꽃을 주었고, 자신은 두 번째 단추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스가와라는 단추를 잘 가지고 있을까. 히나타는 제 교복 주머니에 들어있는 그의 두 번째 단추를 손으로 매만졌다.
그래, 자신만 해도 고등학교 때의 추억을 떠올리며 좋아하고 있는데 재학시절 저를 끔찍이 아꼈던 스가와라야 오죽할까. 스가와라는 3학년, 곧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자신은 이제 막 입학한 1학년이었다. 이 교복을 입고 제 머리를 엉클어주며 예쁘다, 예쁘다 해주던 게 아직도 생각난다. 그때만 해도 스가와라와 동거를 하고, 아무것도 몰랐던 제가 이벤트를 해주고자 이 교복을 다시 한 번 입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때는 오월 십 오일. 오늘, 스승의 날이다.
며칠 전 히나타는 바쁜 일이 마무리되고 주말을 맞아 쉬고 있는 스가와라에게 넌지시 물었다.
‘응? 수요일? 바쁠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일찍 오셔야 해요! 꼭이요.’
‘응, 알았어. 퇴근하자마자 바로 달려올게.’
교복을 입고 이벤트를 하기 위한 최적의 날이 스승의 날이라는 것도 동기가 알려준 정보였다. 오늘이 스승의 날인 만큼 고등학교 선생님인 제 연인을 위해, 일로 지친 제 연인을 위해 준비한 이벤트를 성공시켜야 했다. 히나타는 교복을 입고 거울 앞을 이리저리 돌아봤다. 완벽하다, 완벽해. 이제 스가와라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오후 여섯 시.
스가와라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히나타는 마지막으로 거울 앞에서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단추를 꿰었다 풀었다, 반복하다 두어 개를 풀고 곧 돌아올 스가와라를 마중하기 위해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쇼요?”
“어서 와요! 식사하실래요, 목욕하실래요? 아님, ……쇼요부터?”
와, 이걸 정말 하게 될 줄이야. 남자에게 아주 효과적인 말이라고 해서 외워뒀는데,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부끄러움이 몰려든다.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게 느껴질 정도로 몸이 더웠다. 그래, 이렇게 부끄러운 대사까지 했는데. 뭐라도 말 좀 해봐요. 히나타는 아무 반응이 없는 스가와라를 힐끔 쳐다보았다.
“쇼요.”
“아, 나로 할 거예요?”
된 건가? 히나타가 헤실헤실 웃으며 스가와라에게 다가가려 할 때였다. 쇼요. 분명 제 이름을 부르는 게 맞는데, 여느 때와 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불러주는 것과는 달랐다. 제 이름을 부르는 것이긴 한데, 그렇긴 한데.
“쇼요. 내 직업이 뭐지?”
“고, 고등학교 선생님.”
“그래, 나는 선생님이지. 그럼 쇼요가 입고 있는 건 뭐지?”
“……고등학교 교복?”
남자의 두 번째 로망은 교복이라면서!
입이 귀 끝에 걸려 헤실헤실 될 게 눈에 선하다면서!
제게 교복을 입으라고 알려준 동기가 원망스러웠다. 천재는 무슨, 천재야. 히나타는 아주 무감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는 스가와라의 얼굴에, 괜히 잘못을 한 것만 같아 스르륵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스가와라는 그 앞에 앉아 엄근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쇼요는 이런 플레이를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 그게.”
스가와라는 마치 난 선생이고 넌 학생이야라는 얼굴로.
“뭐부터 할까. 숙제 검사? 쪽지 시험? 아니면 내 담당 과목인 수학 수업은 어때.”
“에? 코우시? 잠깐만요?”
“교사는 학생과 연애가 아니라 공부를 해야지.”
이게 아닌데. 이런 플레이가 아닌데. 이렇게 앉아서 수학 수업을 듣고 있어야 하는 이벤트가 아니다. 좀 더 성인답게, 어른의 연애라는 게 있잖은가. 하지만, 스가와라는 그럴 용의가 없어 보였다. 이게 아닌데!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이벤트에 히나타의 눈썹이 일그러지며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