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 즉위한 황제가 경쟁자들을 제거하는 일은 만고에 흔한 일이었다. 황좌를 이을 명분. 그 싹수가 시퍼런 모가지들은 썩둑썩둑 잘려 반역자라는 죄명을 달고 전국을 돌았다. 오래도록. 저마다 각색으로 또렷하던 인상이 말라붙어, 종국에 저자 생선가게에서 파는 오래된 북어포와 비슷해질 때까지. 더하여 그들의 궁에 살던 처첩 또한 자식과 함께 모조리 부군의 곁으로 갔다. 살아남은 음인들이라고는 겨우 아이를 가진 적 없는 이들뿐. 그네들은 비단옷이 벗겨져 창기로 팔려갔다.
그뿐인가. 각 왕들에게 줄을 대고 살던 가신들도, 외손자를 황제로 만들기 위해 애면글면 굴던 외척들도 마찬가지로 처참히 저승길을 갔다. 부리던 사병, 성년 이상의 사내 노비들까지도. 그렇게 참해진 목숨의 수만도 무려 만을 헤아려 넘겼으니 그야말로 피바람, 곡소리도 못내는 죽음이었다. 어찌나 죽여댔던지. 황도는 물론이오 지방의 내로라하는 유지들까지 모두 납작 엎드려 황제가 휘두르는 칼의 눈치를 살폈다. 간혹가다 멈추시라 상소를 올리는 자도 있었다. 이대로라면 황가의 손이 다 끊기겠다 싶어서였을까. 그만하셔야한다 대전에 엎드러져 간하던 사람도 있었다는데, 하여간에 결국은 쓸모없는 일이었다. 그건 정말이지 기록에도 남지 않은 개죽음이었으므로.
더 이상은 죽일 명분이 없었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 황제는 망나니 같던 태도를 바꾸었다. 황제의 동복형제 두엇을 빼고 나니 남은 황가의 직계 남아들은 겨우 한 줌. 어미의 태내서부터 병신으로 난 놈과 어린 시절 총기는 잃고 기루의 기둥서방처럼 구는 놈팡이, 예술에 미쳐 사는 작자 등. 죄 휘두르는 대로 굽이쳐질 쭉정이만 남았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못난 족속들 같으니. 남은 왕들을 하나씩 불러다 독대를 마친 황제는 후궁의 가는 허리를 끌어안고 침상을 뒹굴었다. 명줄을 잇게 해준 그네들의 하찮음을 조소하면서.
진왕부에 황제의 칙서를 들고 사자가 찾아온 날은 독대 후 나흘 만이었다. 황명이오. 전이었다면 선황의 조카와는 감히 눈도 못 마주쳤으련만. 사자로 온 환관은 이제 목을 빳빳이 치켜들고 대문을 넘었다. 미리 깔아둔 깔개를 밟고 수 개의 문을 지났다. 기별을 받고 미리 깔개를 깔고 기다린지 장장 여섯 시간. 황궁에서 진왕의 궁까지는 말을 달려 겨우 이각(삼십분) 이 될까 말까 한 거리였다.
"황제께옵서는 왕들의 주청에 따라 각 왕부를 황도에서 몇몇 지역으로 옮기는 것에 허락한다 하셨습니다. 덧붙여 전하시기를 이는 먼 땅에도 빛이 들기를 갈망하셨던 위대하신 태조의 뜻에 따름이니 부디…."
뒤로 줄줄이 덧붙은 찬연한 말들의 무게에 고개가 숙여졌다. 참으로 끔찍스럽게 무거운 말이 아닌가. 일가붙이를 위해 손가락까지 잘랐다는 태조. 기가 찼다. 조금이라도 권력 다툼의 씨앗이 될까 싶어, 배다른 형제를 죽여놓고 어찌 태조를 끌어다 대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불현듯 뇌리에 이마가 둥글던 얼굴이 하나 스쳤다. 총명하고 재주가 깊다 하나 그 아이 겨우 열하나. 황제는 자신의 막내아들보다도 어린, 배다른 동생을 지난달 죽였다. 그리고 나온 재산의 반은 환관들에게 뿌렸다지. 황은이 그저 도탑습니다. 구역질이 오르는 낯은 그저 숨겨야 하기에, 황공하다는 추임새를 붙이며 땅으로 허리를 굽혔다. 나비의 날개 자락처거리는 틈. 햇빛이 닿지 않아 탁해진 눈동자가 신 끝을 노려봤다.
"진왕께서는 남방으로 가십니다."
왕부의 너른 뜰 안에 모여 선 수많은 사람 중 저 말뜻을 모르는 자는 없으리라. 지역민의 풍습도 다르고 기질도 수상하기로 유명한 곳이 남부였다. 수풀이 우거지고 발 내딛는 대로 다리통 만한 뱀이 덤벼들매 툭하면 야만인들이 난리를 떠는 미개의 땅.
너는 거기서 죽어라.
질긴 목숨 값으로 험한 묫자리를 받는구나. 그러나 세상 제일 귀한 줄은 명줄이노니. 이미 죽어 벌레들에 살이 파 먹히는 것보다는 살아서 당하는 조금의 치욕이 나았다. 하여 찬찬히 들어 올린 얼굴에는 낯색하나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늦은 오후의 햇볕을 받아 뺨이 꽃과 같고 이 아침에 꿀을 발라 매끄러이 정돈한 입술은 반짝임이 어여뻤다. 그 어여쁜 입새. 농다운 말이 그야말로 비단처럼 흘러나왔다. 철모르는 징징거림을 조금 달고서.
"저런, 그곳의 기루에는 추한 이들만 득실거린다 들었는데. 이를 어찌합니까."
그러니 사자의 낯짝은 참으로, 네놈은 참도 명예도 무엇도 없는 모양이구나. 그 짝이었다. 하지만 나고 자란 고향이자 익숙한 곳을 떠나 저 멀리 어드매로 간다는데, 그깟 값싼 경멸쯤이야. 대신 너부적거리는 주책맞음으로 가리고 기다리는 말이 있었다. 어서. 그리 오매불망 기다리던 대답은 일장 연설의 마지막에서야 돌아왔다. 아, 하고.
"…끝으로, 매년 칠월 칠 일에 맞추어 약속된 이를 보내노라고 황제 폐하께서 약조하셨습니다."
하마터면 욕설을 뱉을 뻔하였다. 내가, 내가 그리 애원하였는데. 겨우 하루. 황제와 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에 사자를 비롯하여 다른 모든 이들이 의아해하건 말건, 비참이 온 혈관을 타고 돌았다. 무릎을 굽히고 깔개 위에 엎드러졌다. 목숨이 간당간당하매 양인으로의 자존심까지 내버릴 적에도 나오지 않던 울음이 터질 뻔함을 숨기기 위함으로. 나는 이제 온 일 년을 칠월 칠 일, 그 하루를 위해 살겠구나. 목울대가 아주 잘게 떨렸다.
"진왕 오이카와 토오루, 황명을 받들겠습니다. 만세. 만만세."
황도에서 남방의 청유성까지는 바투 잡아도 석 달 여가 걸렸다. 마부와 시종들이 헐레벌떡 용을 쓰고, 자주 말을 갈아 달려도 석 달. 그러니 히나타는 일 년 열두 개월 중 반을 뚝 잘라 미친 듯이 구르는 마차 바퀴 위에 타있다는 말이다. 참. 팔자하고는. 덜그럭거리는 마차 안은 영 편치가 않다. 이리 앉으면 허리가 배기고, 저리 누우면 골통이 다 덜덜 떨렸다. 아주 방금 지난 그 길바닥 어디에 잔돌이 있었고 주먹 덩이만 한 자갈이 있었는지 능히 그릴 수 있을 정도라. 쑤시는 머리통을 붙잡은 히나타는 발치에 깔아둔 이불을 끌어올렸다. 조금이라도 푹신하게 누울 자리를 만들기 위한 어쭙잖은 시도였다. 하지만 아늑한 잠자리와는 절대로 거리가 멀겠지. 알지만 그래도 안 할 수 없으니 하는 게다. 매일매일, 끊임없이 노력해보지만 전혀 개선되지 않는 굴레. 히나타는 이게 꼭 저가 길바닥에서 보낸 근 십 년의 시절과 닮았다 생각했다.
일찍이 약혼을 하였다. 툭하면 히나타를 꼬맹이라 부르던 양인으로, 아직 덜 컸던 저의 몸이 양인지 음인지, 그도 아니면 중인인지 알기 전부터 집안에 약조를 걸었단다. 암만 보아도 양인으로 자랄 떡잎은 아닌 성싶으니 거두겠다고. 지금 생각하면 참 머리로 피 오르게 하는 얄미운 소리였으나, 그도 그럴만한게 그 이는 당시 황제 폐하와 친동기인 정왕 전하의 아들이었다. 문무 양쪽에 제법 소질이 있고 얼굴이 유달리 어여뻐, 일찍 간 동생을 애달파하던 황제의 귀여움을 많이 받던 조카였다고 했다. 그러니 말 한마디가 천금같아, 아직 히나타의 체질을 모름에도 집안 어르신들이 이러저러 금시 혼인을 약조한 게다. 성은 황가의 성이니 오이카와. 자는 토오루. 일찌감치 아버지의 궁을 물려받고 진왕이라 작위를 받았다.
어쩌면. 히나타는 진왕과 혼례를 치르고 그의 비로 무던한 삶을 살았을지 모른다. 선황께서 그렇게 갑자기 병환이 나지 않으셨다면. 좀 더 오래 건강히 살아서, 후계구도를 정리해주셨더라면. 간식을 숨기네 마네 투닥거리기도 하였을 거고, 둘이 손 붙잡고 장에 나가 옷감도 보았겠지. 진왕은 활달한 히나타의 성정을 능히 아는 이였으니 종종 밖에서 말도 달리게 해주었지 않을까. 그러나 그건 이제 다 공상일 뿐이오. 히나타는 생목숨이 여럿 날아가고 저가 무시로 앞을 지나던 궁의 주인이 바뀌는 꼴을 보았다. 그러나 그네가 가엽다 할 처지도 못 되는 게 제 팔자. 관직에 올라있는 아비 목이 날아갈까, 황실의 자손인 제 약혼자의 목이 날아갈까. 노심초사하던 시간이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만, 그게 다 좋은 일은 아니었다. 정혼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머나먼 곳으로 유배 아닌 유배를 당했다. 더하여 일 년에 딱 하루만 만나라는 영문 모를 황명까지 받아, 이렇게 매해, 반년씩 길을 떠나는 게다. 왜 그저 혼례를 치르게 허하여주시지는 않고. 되짚자니 감히 황심이 원망스럽고 답답해. 거의 다 왔다는 마부의 말에야 히나타는 마차의 작은 창문을 걷어 올리고 바깥 풍경을 살폈다. 짙디짙은 녹색도 이젠 익숙했다. 안녕, 또 만나네.
오이카와는 히나타를 제법 아꼈다. 물론 볼 적마다 언제 크느냐 놀리며 히나타가 들고 있던 월병을 크게 한입씩 빼앗아 먹긴 했지만, 진왕쯤 되는 이가 매일같이 정혼자를 보러 오는 정성을 들이는 것부터가 그러했다. 그는 이따금 들어 비취잠을 사다 주기도 하였고, 사달이 나기 직전 즈음엔 뒷동산에서 뛰다 온 히나타의 산발이 된 머리를 직접 소비(빗) 를 들어 빗겨 주는데 취미를 붙이기도 하였다. 꼬맹이 머리, 이거 완전 개털이잖아. 그러면서도, 개털을 뭐 하느라 빗기느냐 박박 우기느라 돌아보면 싱그레 웃었다. 씩씩거리던 쪽 뺨이 다 발개질 정도로.
일 년 만에 보았을 때도 오이카와는 변함없이 다정했다. 높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히나타는 전하, 그리 입을 떼려했으나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누군가와 말을 하다 뒤돌아 본 반듯한 얼굴에 환하게 번지는 반가움과 다감함이 그득이었으므로.
"으응. 내 귀한 분이 오실까 오매불망 기다렸구만, 어디서 밥 동냥 온 유랑패 꼬마 아이가 왔누."
…아 물론 저 이의 성격상 짓궂은 장난을 절대로 제할 수 없다는 게 흠결이라면 흠결이나, 하여간에 말이 그렇다는 거다. 어쨌거나 히나타가 한정 없이 다정을 받았음은 사실이니. 하지만 알면서도 마음이 욱하기는 한단말이어요. 반가이 끌어안으려던 팔을 허리에 걸친 히나타는 씨근거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건 절대 열받아서가 아니야. 뛰어와서 그래. 뭐… 없는 말은 아니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시종들도 내버려 두고 달음박질을 쳤으므로.
"제가 왜 유랑패예요? 밥 동냥은 또 무어…. 아 됐어요. 전하는 그 귀하신 분 오실 때꺼정 계속 기다리셔요. 밥 빌으러 온 저는 가볼ㄹ…."
"어? 아니 이게 누구야, 응? 우리 어여쁜 쇼쨩 아니야? 가만 좀 있어 보아. 그러네. 오이카와 상 눈이 어두워서 잘못 봤거든?"
얼씨구. 호들갑을 요란스레 떠는 작태에 물러나던 사람의 눈이 화등잔 만해진다. 그리고 그 꼴을 마주 본 히나타는 일 년여만에 보는 제 정혼자가 부끄러웠으나 그건 아주 조금, 좁싸래기만큼이고 순간에는 지기 싫은 마음이 더 컸다. 하기사 황도에서 양인, 중인 아이들과 뒤섞여 왈패짓을 하고 다닌 성정이 한순간 우에 갈리 없었으니.
"왜 거짓말을 하시고 그러십니까 전하? 어여쁘다니요? 아, 방금은 저보고 밥 동냥 왔냐면서요!"
"어쭈. 꼬맹이 많이 컸다? 아, 그러게 누가 자발 맞게 자빠져 흙칠을 하고 오래? 음 …물론 우리 쇼쨩은 이렇게 흙발싸개질을 한 옷을 입고 있어도 귀엽지만. 이리 와. 어디를 가려고?"
"됐어요. 이씨. 놔주세요, 전하 옷에도 묻잖아요! 아, 쫌!"
"에이. 가만히 있어봐. 오랜만인데."
그러곤 또 그 웃음이었다. 머리를 빗겨주다, 신을 벗겨가 쫓아갔을 때 새 신을 내밀어 주고는 짓던. 가지런한 이가 다 드러나도록 입꼬리를 올리면 히나타는 뭐라 반박을 하기가 힘들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쨌건 제 입장에는 그게 참 약았다. 하여 눈을 주욱 찢고 있자니 오이카와는 다시금 끌어안은 팔을 풀어 이쪽을 보았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음. 음. 당장 목간 물 받으라 할까? 꼬맹이 허벅다리에도 흙 묻었나 안 묻었나 내가 씻… 억, 아니 쇼쨩. 농이었어."
아니 이 분이 진짜. 그간 어디서 못된 말을 배우셨냐 옆구리를 찌르고 돌아섰다가 장히 호화로운 사과를 받았다. 이곳에서 제일 맛난 밥상을 차려주겠다는 말에 넘어간 건 결단코 아니었다. 그저 꼬맹아, 하고 부르는 말투가 달짝지근하여 그랬을 뿐이다.
하여간에 오이카와는 팩하니 토라져 가려는 히나타를 품에 가두어 안고서는 곱다 곱다, 그대로 들어 방에 앉혀두고는 땅에 발 한 번을 못 대게 굴었다. 칠석날이 다 가도록 내둥. 종일 볼을 부볐고, 자신의 무릎에 얹은 채 낮잠을 재웠으며 손수 밥을 떠먹여주었다. 손가락을 얽은 채 보내기를 딱 하루요. 황도로 돌아가는 마차에 안아다 실어 두고는 히나타의 짧똥한 턱 끝에서 입술을 떼지 못했다.
"내 이번은 이걸 준비하느라 늦었지만 다음부터는 꼭 미리 마중을 나갈게. 알겠지. 약조해."
다음이래봐야 달포 후도, 석 달 뒤도 아니요 그게 딱 일 년 뒤의 같은 날이거늘. 히나타는 발모가지에서 채워지는 자그마한 방울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꼭이에요. 하면서.
그 다음번부터 오이카와는 정말로 마중을 나왔다. 몇 시각 전부터 기다렸을지, 어깨에 길게 걸치는 연한 청색의 옷자락 끝에 흙물이 잔뜩 든 채로. 마차가 서는 길 어귀부터 대문까지의 짧은 길을 둘은 매번 산책하듯 걸었다. 어째 매 해가 갈수록 더 거칠어지는 손에 히나타 제 손을 마주 쥐면 오이카와는 널찍한 보폭을 느리게 줄여주었다. 뒤에서 황도에서부터 히나타가 챙겨온 숱한 짐을 내리는 시종들과 저 앞에서 진왕부의 대문을 열어두고 시립해있는 수많은 사람들. 그 사이가 한 오십여 발자국쯤 되려나. 애시당초 황제의 명은 진왕부에서 둘이 만나는 걸 허락한다였다. 고로 그 짧은 새는 황제의 허가를 받지 않았음이라. 그러니까 요 간새는 무법지대인 거네요. 그러면 오이카와는 네가 문자를 다 쓰냐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런데 이 분이 글쎄.
"…래서 나도 처음에는 땅이 뭐 이리 진가 했지. 습기가 많아서 그렇다고 듣긴 했는데 실상이 좀 더 하던걸. 아, 해서 엊저녁에는 맛키가 목뼈 분질러 먹을 뻔했지 뭐야."
"네에? 하나마키 상이요? 왜요?"
"응? 아아. 꼬맹아. 봐봐. 저기 보여? 저 산."
곧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끝에는 한눈에도 험히 보이는 산이 있었다. 눈이 달렸으니 보이죠. 고개를 위아래로 짤랑이면 오이카와의 붉은 입술 끄트머리 한쪽이 살찌기 올랐다.
"저리 가는 길이 이짝보다 작히 질어. 헌데 저기서 밤에 말을 몰다가 말이 넘어져서 저도 땅에 굴렀대. 진짜 미련하지 않아? 오밤중에 흙귀신 꼬락서니로 방문을 열길래, 오이카와 상 졸도할 뻔하였어."
그러니 호 해줘. 놀란 가슴을 달래 달라나. 어째 매번 뻔뻔스러워지시고, 낯짝 뜨거워질 소리를 장가도 안 드신 이가 자꾸 하시나 몰라. 히나타는 여전히 멀끔한 생김을 째려보며 발걸음을 재게 놀렸다. 남방 물이 맞는가 어째 점점 능글맞아지니 일 년에 한 번 겨우 보는 저로서는 무척, 섭섭했다. …살겠다고, 황제 앞에서 기루 드나드는 척하실 때도 저러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욱지기가 솟아 팔꿈치에 힘을 실어 옆구리를 갈긴다. 아파! 묘한 말보다야 차라리 점점 흉폭해진다는 구박이 듣기엔 나으니까.
늘 그런 식이었다. 먼 땅에서 객사할 뻔한 하나마키의 소식처럼, 짧은 거리의 마중길이자 나들길인 흙길 위에서 둘은 소소한 농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어느 해는 마차 문이 열리고 얼굴 보기가 무섭게, 키 크는 약을 구해두었다며 요란을 떨던 오이카와가 히나타에게 정강이를 발로 까인 적이 있긴 했다만 그뿐이었다. 바로 다음 해에는 갓 태어난 강아지가 궁 안에 있다 하여 나란히 뛰기도 하였으니까. 그게 아주 요란한 인사 대신 둘 사이에 주고받는 간절한 반가움의 표현이었다. 보고 싶었다는 말보다 먼저 튀어나오는, 당신께 드리고 싶던 말.
"손목에 멍들까? 그거."
"그럼 안 들겠어요? 보세요. 시뻘건데. 이리 세게 때리시고… 약 주시나. 아, 다음엔 진짜 제가 이길 거거든요. 오늘은 조금, 어, 집중을 덜 한 것뿐이지만은, 이다음에는 기필코!"
"하이고. 집주웅? 꼬맹이, 배부르게 밥 먹이고 주전부리 먹였더니 흰소릴 하고 있네? 우리가 투호를 한 횟수가 여덟 번인데 내가 여덟 번을 이겼잖아. 집중은 무슨. 얌전히 올라갔다가 와."
고로 또 다른 안녕도 비슷하였다. 올라가는 길의 짐이 올 적보다 더 많이, 무슨 남방의 쌀이네 피륙이네 그런 걸 실은 마차 문 코앞까지 히나타는 오이카와와 투닥거렸다. 꼬맹아, 너 낮잠 잘 때 코골더라. 소소한 거짓말에 눈썹을 실그러뜨리면, 농도 못하게 구느냐 뺨을 어루만져 주었다.
"아주 놀고 자빠지셨네요. 전하. 조금 있으면 자시(子時, 밤 11시~새벽 1시)인데 얼른 보내야 할 것 아닙니까. 아무리 성주들이 편의를 봐주어 문을 열어준다지만 날이 끝나기 전까지 붙들고 있습니까. 비도 이리 오는데."
어쩜 횃불 아래 찡그린 미간도 곱누. 엄지로 눈썹 사이를 문지르는 오이카와 옆으로 와서 채근질을 하는 구면의 사내는 늘상 똑같은 이였다. 이와이즈미. 진왕과 친하다 하여 저 이도 장가를 못 들고 여기 남방서 생으로 수절 중이었다. 삐쭉하니 솟은 눈매가 매섭다만, 황도에 살던 때부터 히나타와도 종종 놀아주어 익숙타. 게다가 올라가는 길에 배앓이 하지 말고 먹으라 약재를 넘겨주며 가보라는 손짓도 여전하니 꼭 예전에 목마를 태우며 놀려주다 과일 하나를 따주고 들여보낼 적 생각이 났다. 꼬마, 고뿔 조심하고. 휙휙 내저음 세 번에 슬쩍 흔드는 손바닥 두 번. 그에 한눈을 파는 히나타를 오이카와가 붙잡으며 우는소리하는 정도가 이 칠석 끄트머리, 둘의 유일한 애닲음 표현이었다. 꼬맹아아아.
"이와쨩한테 왜 눈길을 주고 그래? 손톱만한 시간도 아까워 죽겠고만."
"맞는 말씀이긴 하잖아요…. 담번엔 주단도 더 많이 가져다 드릴 테니 기다려주셔요. 그리고 투호도 카게야마한테 더 배워올 터이고, 요번에는 못하였지만 츠키시마랑 바둑도 열심히 두고 있으니까…."
"…토비오? 꼬맹이, 걔랑 안즉도 노는구나? 바둑은 또 뭐람. 하여간에 난 바둑은 취미 없어. 그러니 고만두고 장모님께 자수나 배워두어. 내가 겨울에 베갯잇을 받아보고 한바탕 웃었어. 혼숫거리 준비한 지가 언제인데 바느질이…. 아냐. 아냐. 원앙이 매 같으니 용맹하고 좋았다. 이 말이야."
끝에는 꼭 첫 번과 닮았다. 자시까지 시간을 다 채우기라도 할 요량인지, 오이카와는 한참을 히나타의 턱에 입술을 누르고 있다가 멀리서 들리는 북소리에 마차 문을 닫아주었다. 잘 가라는 말도 없이. 문틈으로 잠깐 마주치는 시선을 끝으로 하고 마차가 움직였다. 비단으로 낸 창은 짧뚱한 손끝으로 잘 열리지도 않았다. 그저 마차 지붕에 단 황제의 옥패와 구슬이 서로 짤랑이는 소리만 요란했을 뿐으로. 서러워. 히나타는 어두운 마차 안에서 입술을 앙다물고 그제야 눈물을 쏟았다. 낯설되 낯익은 목소리가 벌써 그리운 탓이었다.
거나한 연회도 끝은 나는 법이었다. 빗소리도 누를 정도로 요란하던 음악소리가 잦아들고, 연못 물위로 어른거리던 은연정의 등불도 다 꺼졌다. 시종들 여럿이 술에 골아떨어진 주인을 옮기느라 바쁠 뿐인데, 이미 인시*寅時, 새벽 3시~새벽 5시 도 거의 지나갈 무렵이라 그럴만도 하였다. 말술도 이만하면 대취하였을 터이니. 도련님이 올라가시자 마자 이러시네. 그러면 답으로, 그러게 말이야. 그리 기껍게 여기시더니말이야. 굴러다니는 술잔과 바닥에 널브러진 음인의 옷들. 얇디얇은 사로 된 그 옷들을 주워드는 이들 사이에 속살거리는 말소리가 모였다가, 이내 흩어졌다. 뒷정리에 바쁜 그네들의 틈을 헤치고 벌떡 일어나 나가는 취객 덕택에. 요상케도 취중에 휘청임하나 없는 그림자는 바삐 후원을 빠져나가 대문 밖으로 내달렸다.
어둑시근한 새벽녘에는 또 물안개까지 끼었다. 습기가 많음이 딱 남방의 그것이외다. 스산한 새벽 풍경에 홀로 불이 켜진 별당. 가까이 가잡시면 앙앙거리는 교성이 제법 요란하여 가까이 가는 이들의 낯을 붉혔다. 찹찹한 어둠 중에도 저리 내빼는 신입 놈의 샅이 불룩하구나. 황도가 아니라 여서 오래 살아온 고참들은 그래도 적응이 되었는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경계를 섰다.
"으. 짜증나. 그 영감, 술꼬리 한번 더럽게 기네."
문이 열렸다 닫히고, 하나마키가 고개를 저으며 들어왔다. 하얀 얼굴에 두 볼이 약간 발그레한 모양이었다. 그에 마츠카와가 낄낄거리며 웃는다. 두툼한 손 아래로 여럿이 뒤엉켜있는 춘화첩이 뒤집어지니, 비단 싸개 대신 지도가 보였다.
"야. 마츠카와 잇세이. 웃어? 너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하는데?"
"그럼 어쩌라고. 내가 술 석 잔에 뒤로 넘어가는 인간인 걸."
"아오…. 생긴 건 세 동이 비우고도 말짱하게 생겨놓고. 진짜."
의자에 주저앉은 하나마키에게 고생했다 말하는 건 이와이즈미였다. 청유성의 주요 고관 하나를 대취하게 만들었으니 네가 오늘의 공신이라면서. 저네들끼리 공신차라 이름 붙인 꽃차를 한 잔 받은 하나마키는 빗물에 젖은 어깨를 털며 물었다. 근데, 우리 전하는 어디가셨어?
"들어오다 못 뵈었냐. 우리 전하, 저기 계시잖아. 허리짓하느라 힘쓰는 중이신데."
마츠카와는 하나마키가 방금 전 들어온 문을 가리켰다. 아앙, 전하. 제 안에 전하의 씨물을 뿌려주시와요. 문 너머서 들려오는 높은 목소리에 하나마키는 방금 들이켰던 찻물을 놀라 뱉는다. 귀막고 들어오느라 못들었는데!
"미, 미친 거 아니냐. 야, 이와이즈미. 쟤 어디서 데려왔어?"
"쿠니미가 혜음성 사창가에서 주워왔다더라. 생니 뽑히려던 걸, 금을 주고 구해줬다더라고. 가족까지 살려주니 목숨 바쳐서 시키는 일 다 하겠다고 열성이다. 장난 아냐."
대화의 중간에도 저 죽는다 야단인 신음이 높아졌다. 살려주시와요. 하나마키는 얼이 빠져, 취중에 그게 단단하게 서나? 하고 물었다. 이에 무뚝뚝하게 날아온 대꾸가, …안서시나보네. 인사도 없이 조용히 있던 쿄타니의 한방이라. 말문이 막혀 입을 떡벌린 친구의 얼굴에 마츠카와는 숫제 우스워 죽었다. 파묻은 팔뚝 위로 두껍고 진한 눈썹만 슬쩍 나와있으매, 이와이즈미는 문가로 두꺼운 호피 하나를 들고 갔다. 눈뜨고는 못들어줄 저 소리를 조금 죽이기 위함이었다.
어지러운 중에도 저를 찾는 말은 잘도 들렸다. 오이카와는 느슨히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찬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누가 두었는지는 모르나 아마 뻔하지. 이와이즈미 아니면 와타리일 터다. 들여다본 거울 속에는 허옇게 질린 사내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을 홉뜬 탓에 보이는 흰자엔 핏발이 서있고 그 가운데 까만자는 탁하다. 도저히 몇 시각 전, 곰살궂게 히나타를 끌어안던 이와 동일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몰골로. 어금니에 힘을 줄 때마다 턱근육이 울룩불룩 솟았다.
그래. 이별이 가벼울리가 없었다. 마치 두어밤만 자면 또 볼 수 있는 양 세상 하릴없이 굴어 어린 눈망울을, 그리고 강짜를 부리려는 제 심보를 달랬다만. 정확히 네 계절을 흘려보내야만 돌아오는 시간바퀴가 홀가분히 가볍고 마음편할리가 없잖은가. 전 밤, 히나타가 열과 성으로 닦아두고 간 명경 속의 자신은 그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 네 성깔에 가분히 있을 수 없지? 오래 참았다고 웃는 꼬락서니가 참도 습습치못하니, 그래. 고개를 주억이고는 병풍을 걷어 치운다.
"오, 전하 오셨네."
"맛키, 나 기분 별로니까 볶지 말고 그냥 시작하자?"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늘 걸쳐두던 호피는 저 멀리 문가에서 사지를 내걸고 걸려있었다. 죽어서도 흉하네. 하나마키에게 손을 휘휘 저으니 이와이즈미가 장궤를 여럿 꺼내며 입을 열었다.
"아, 예. 예. 뭐. 연회자리서 뒤집어 엎지 않은 걸로도 감사하니까…. 석류군(石榴裙 , 수입해 오던 붉은 색 치마) 안에서 야하바가 보낸 편지가 나왔는데, 황제는 지금 이쪽에는 별 의심을 안두는 모양이야. 우리보다는 서북쪽으로 보낸 은왕을 견제하는 모양이고, 일단 후궁전에서 난리가 나서 바쁘시단다. 황후, 혜귀비에다가 옥소용까지 삼파전이라고 적혀있어."
"…겨우 소용 주제에 황후와 귀비 싸움에 끼어들어? 가능한가 그게?"
대답은 이와이즈미 대신에 하나마키가 했다.
"이런. 우리 전하는 모르시나보다. 그거 소문이 여기까지 파다해. 합방 한 번에 첩지를 받고, 세번째에 재인에서 충의로, 그 다음 바로 소용으로 뛰어올랐다더라. 옥씨 여인 태중에 있는 애가 양인 아들이면 그 애가 다음 대를 이을 거라고 동네 개들까지 노래를 부르고 다니던데?"
"벌써 회임을 했나. 내 사촌 형님은 참 정력도 좋으시네. …다 죽여놓고 지 씨를 여기저기 뿌리는 건 무슨 경우람. 하긴 그러니 별칭이 농꾼이라지."
"오이카와, 입 좀…. 하여간 귀비가 앓아 누울만도 하네. 여태 줄줄 낳은 게 중인이었담서. 근데 황후가 낳은 애는 어쩌고? 어이, 마츠카와 나 그 지도 좀 줘봐."
"여기. 그거 뭐 아직 황태자 책봉을 안했지 않냐? 그러니 말이 많은 게지."
권력이 참 무서워라. 고이 분칠하고 첩첩 궐 안에 앉아 계신 음인들이 독을 썼네 어쩌네 하는 이야기 다음은 멍청하게 제 명줄을 재촉 중인 은왕이었다. 대놓고 사병을 기르고 황도에 선을 대는 중이라 하니, 오이카와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차라리 그 땅 오랑캐들의 도움을 받았어야지. 제 또 다른 사촌은 아마 여적지 그림이며 시를 끼고 산 탓에 영 머리가 굳어버린 모양이었다. 차라리 그냥 거기서 모래 풍경이나 황색의 돌절벽이나 그리며 사는 것이 좋았을 터인데. 곧 군대가 서쪽으로 갈 것으로 보인다는 야하바의 말에 마츠카와는 혀를 끌끌 찼다. 또 모가지 여럿 땅에 구르겠네. 그러면서 펼친 지도 한켠에 붓으로 금을 길게 그었다.
"그러면 남금군에서 빠진다는 말이겠네. 얼마나 빠지지. 이만? 삼만?"
"오만."
"뭐?"
놀란 소리를 낸 건 마츠카와 뿐이 아니었다. 탁자에 턱을 괴고 있던 오이카와는 놀란 표정으로 손을 떼었다. 옆의 하나마키도 입을 벌린 채 이와이즈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남금군의 상비 인원은 대체로 이십 오만 정도로, 제국의 위용에 걸맞게 절대 적은 숫자는 아니었다. 전쟁도 없는 평화시의 상비군이 그만큼. 그러나 그게 다 동원 가능 병력도 아니다. 국경 지대에 배치하는 인원이 십만이오 황도와 주요 도시의 경비에만 삼만에서 오만이 쓰인다. 그러니 당장 황제가 가용할 수 있는 전력은 기껏해야 십만에서 십이만 명 정도거늘. 오만이면 그 절반인데. 오이카와는 혀로 제 입 천장을 누르다 하, 하고 웃는다. 서쪽의 제 사촌. 가느다란 그 생김을 떠올려보곤, 머리가 굳었다는 말은 취소하기로 한다. 어지간히 많이 모은 모양이로세.
"…지원을 보내."
"뭐? 전하, 미친 소ㄹ…. 야, 오이카와. 농담이지?"
많이 놀랐는지, 하나마키의 입에서 담을 넘어 남의 집 감서리를 하던 동네 사내아이들 말투가 툭 튀어나왔다. 구석에 서있던 쿄타니마저 흘끔 쳐다볼 정도로 센 어투였다. 정작 듣는 오이카와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아냐. 맛키. 농 아니야. 오이카와 상 이건 진담이거든. 서쪽의 내 훌륭하신 사촌께옵서 분투를 하신다는데, 비록 한살 차이긴하여도 아우된 도리로 내가 돕는게 맞지 않겠어?"
"잠깐만. 도리고 나발이고, 여기 써진 말로는 은왕이 이만을 넘게 모았다 하더라. 고전을 하게 하려면 거기에 만 이상은 보태야겠지. 하지만 이쪽도 힘들게 모으고 있는거 알지. 무턱대고 뺄 수는 없어. 그리고 만의 하나, 걸리면 어쩌려고. 너나 우리 목만 날아가는 거 아니잖냐. 여기 성주들이나 황도에 어머님들도 얽혀. 그리고 꼬마…. 히나타 걔까지."
"알거든요? 걸려도 우리 꼬맹이는 살리려고 오이카와 상, 정 덜주는 척 많이 노력하고 있잖아. 차츰차츰. 연기 열심히 하고있으니까. 이와쨩. 머리를 좀 말랑하게 해봐. 나도 사람은 못보내. 대신…."
"목연성이 가까워."
말뜻을 먼저 알아들은 요량인지, 마츠카와가 지도 한구석을 짚었다. 상단으로 이 성, 저 성 거쳐가자면 끝에 닿는 곳은 목연성이었다. 여기서 은왕부까지 골짜기를 타면 밤에도 이동할 수 있어. 꽤 솔깃한 말에 방 구석지에 박혀있던 이들도 모여들었다.
결국은 지겠지. 모두가 알고는 있었다. 황제가 이만의 곱절도 넘는 오만을 끌어다 댄다고 하였으니 이길 방도가 없을 터다. 은왕과 그 아래는 아마 호기에 넘쳐 이길 수 있다 생각하는 지 모르겠으나 한발작 떨어져 보는 입장에서는 그랬다. 혹, 기적이 일어나 그 오만을 모조리 이겨낸다 하더라도 황제에게는 또 오만의 여유병력이 있고, 더 징집을 하여 보내고…. 종래엔 죽음뿐이겠다. 하지만 어차피 이쪽서 바라는 내용은 은왕의 승리가 아니잖아. 오이카와는 눈을 반뜩이며 역할을 나누었다. 죽는 것도 내가 아니니, 열심히 싸워보시게들.
"그럼 쿄타니, 한잠 자고 나서 정오 이후에 다시 와라."
"예."
지도는 찢기워 촛불에 태웠다. 그리고 그걸 숨겨두었던 화집은 다시 비단으로 감싼 음란한 책으로 돌아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쿄타니의 옆구리에 끼워졌다. 야하바가 보내온 편지도 읽는 족족 태워졌다. 한 장은 북쪽 국경의 동태요, 또 다른 장은 조정의 소소한 알력관계에 관한 내용이었다. 형부와 이부가 사이가 나쁘다니. 하나마키는 노친네들이 죽을 때가 되었는가 볼장 다봤다며 편지를 구겨 태웠다. 그렇게 겨우 마지막 장. 오이카와는 쿄타니와 와타리에게 이만 나가보라 손짓을 했다. 호피를 떼어내고 문이 열리니,
"아으으응, 전하아. 저 죽어요. 하윽…."
각좆 하나 타고 밤을 새누나. 홀로 내지르는 신음이 요란했다.
"야, 야, 문 빨리 닫아."
정력은 황제 폐하가 아니라 쟤가 더 좋아. 머리를 잘잘 흔들던 하나마키는 시간을 살폈다. 곧 동이 틀 때였다. 문을 닫아 작아졌으나 여전히 들리는 신음을 음악 삼아 벌이던 회의도 마무리 할 때가 된 거다. 별당의 침실, 그 안쪽에 작게 만들어진 내실을 대충 정리하는 손길이 바빴다. 물론 움직이는 건 마츠카와 혼자였다. 좀 같이하지? 허나 움직이는 손이 없다. 오이카와야 신분으로 따지면 상전이었고, 이와이즈미는 그 상전과 대화 중이었다. 그러면 남는 건 하나마키뿐이지마는. 야하바가 무어라 했나 보자아. 움직이기 싫으니 괜한 타령조를 붙여가매 한장 남은 종이를 펼쳐들더라. 오. 이거 꼬마 얘기잖아.
"응? 쇼쨩?"
"아, 저번에 보고가 좀 늦었다더니 이거였나보다. 읽어줄게. 이번 달도 언제나와 같음. 뒷뜰 나무에 오르려다 떨어져 크게 다칠 뻔 하여 안주인께 혼나고, 이틀을 방 안에서 앓음. …이게 삼월 말이란다. 대체…."
빽빽한 내용은 모두 비슷하였다. 어느날의 히나타는 고양이를 쫓다 할아버님의 바둑판을 들러먹어 꾸중을 들었고, 어떤날은 아랫것들 틈에 끼어 야식으로 떡을 구워먹다가 야하바를 발견하고 이르지 말라 떡 반쪽으로 입막음을 시도했다. 또 다른 날은 여동생과 같이 놀다 공을 담 밖으로 날려 영영 잃어버렸는데 그게 제 공이 아니라 카게야마 가 도련님의 공이었단다. 그런, 소소한 일들.
"…꼬마…. 여기서는 좀 의젓한 티를 내더니만…. 별로 다를 게 없구나."
읽던 하나마키나 듣고 섰던 이들이나 다들 하이고. 한숨을 쉬었으나 입꼬리가 스물쩍 올라있었다.
"떡 구워먹다가 걸리니까 뇌물을 줘? 이야…. 걔는 어릴적에도 나만보면 단떡 사달라고 줌치를 뒤지더니…. 전하네 꼬마, 떡귀신인건 어째 다 커서도 변함이 없다?"
마츠카와가 중얼거렸다. 그러니 하나마키가 말하기를 나한테는 월병, 이와이즈미는 만두랬다.
보내기를 겨우 반나절도 안되어놓고서 히나타의 이야기를 듣는 건 소소하게 즐거웠다. 어째 정강이에 못보던 흉이 생겼더니 또 넘어져서 그랬구나. 하나하나 조각을 맞춰놓으면 그리우면서도 귀여워. 편지의 일은 벌써 몇개월 전일진데도 웃음이 새었다. 몇년이 훌쩍 지났음에도 여전히 머릿속에 생생한 히나타네 집. 궁보다는 작되 소담한 맛이 있던 그 집 곳곳을 생각하면, 오이카와의 머릿속에 저의 약혼자가 요리조리 뛰놀았다. 부엌에서 탄내와 검댕을 홈빡 뒤집어쓰고 뛰어나오던 산발의 말썽쟁이부터 머리 좀 빗겨준 걸로 꽃물이 오르던 찹쌀떡같은 볼까지. 미친듯이 팔랑거리던 그날 히나타의 속눈썹만 생각하면 오이카와는 센 술이라도 삼킨 양 속에서 천불이 났다. 곧. 곧 그 눈꺼풀에 마음 풀리는 대로 입술을 대고, 내키는 대로 품에 얼그러안아 노닥일 수 있겠다. 남방에 발을 딛기 전부터, 그건 오이카와의 바람이었다. 그걸 위하여 난봉꾼 행세에 자존심도 내버리지 않았던가? 그것뿐이 아니라,
…저가 부러 철없고 신분도 썩 높지 않은 아이와 정혼을 한 까닭이 무에 있겠습니까. 생식이 되지 않으니 여즉 숱하게 기루를 드나들어놓고도 슬하에 아이가 없는 것을요. 부대 멀리 가더라도 사내가 나이 먹도록 총각인 모양은 아니도록 은혜 베풀어주소서.
고자 행세를 하며 머리를 땅에 부딪히던 너른 금색의 대전. 그렇게 얻어낸 게 고작 하루였다. 애착을 보이니 인질로 잡아두겠다는 속셈이었을까. 오이카와는 황제를 비웃었다. 차라리, 혼례나 치루고 둘이 내려가라 두었으면 이렇게 안달이 나진 않았을 터인데. 여기저기 굴을 판 여우새끼가 제 굴에 빠지겠다며 비웃었을 때였다.
"…베갯잇은 내일 보낼 듯하고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이불청은 다시 수를 놓는다 하는데 언제 보낼 지는 미지수임. 이라네. 이불청이라... 꼬마 손톱 빠지는 거 아냐? 그리고 끝으로는, 아직 특기할 내용은 아니나 사월 초, 황성에서 사람이 옴. 벌써 약관이 훌쩍 지나매 이제는 혼례를 생각할 때라 함. …엥?"
"혼례? 전하랑?"
"어, 뭐야. 드디어 황제 폐하가 마음 고쳐먹으셨다냐?"
"가만있어봐. 자세한 내용까지는 미처 모르나 안채 시종의 말을 빌자면, 자주 어울리는 카게야마 가의 장자나 츠키시마 가의 차남. 아니면 북쪽서 온 색목인과 인연을 맺음이 어떠한지 이야기가 있었…다고…."
저거. 히나타가 얼핏 말해주었던, 투호와 바둑을 섞여 한다는 이름들. 그에 오이카와의 눈이 가라앉았다.
봄, 황도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물론 눈알이 시퍼런 이들까지 왔다갔다하고, 온 지역의 사람이 다 몰리는 곳이 황도니만큼 괴상뻑적지근한 소문이야 평소에도 저잣거리에 오분만 서있으면 귓구녕이 터지도록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 이곳 출신이라면 어지간히 흥미롭지 않는 이상 저와 상관없는 이야기는 귀에서 거르기 마련인데,
"…렇다네. 얘. 너는 괜찮으니?"
관련이 있는 말이면 또 달랐다. 모두가 은근슬쩍 눈치를 보고, 귓속말을 하다 앞에서 입을 합 다물어 버린다. 그러다가 결국은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저렇게 물어보매. 네. 괜찮아요. 히나타는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사실은 그 약속도 파했건만.
근래는 흉흉한 시국이었다. 서쪽에서 은왕이 반란을 일으켰다는데, 가담한 인원이 예상보다 훨씬 많은 모양이었다. 서남의 열 개 성들이 물자를 대었다는 말이 수면 아래로 퍼졌다. 어마어마한 양의 쌀들을 사들인 상인들이 중간에 뚝하니 사라졌으며, 남쪽에서는 꿩의 깃이며 대나무 대가 씨가 말랐다 했다. 겨울에 서쪽은 비가 안 오니 아마 메마른 골짜기 새로 갔겠지. 카게야마는 몸을 사려야한다고 했다. 서쪽에 연을 둔 사람들과는 일절 관계도 없이 굴어야 한다고. 그건 츠키시마나 스가와라는 물론 늦은 밤 찾아온 삼촌의 입에서도 나온 말이었다. 그쪽 성주들은 곧 다들 목이 달아날 거랬다. 오만명을 보내시더니 만을 더 보내셨다는데. 하지만 정말 스산한 말은 그게 아니었다. 어차피, 히나타 저의 집은 사대째 황도에서 기거 중이라 서쪽과는 일체의 무엇도 없는 걸.
사람들은 진왕이 미쳤다고 했다. 미쳐서 사람도 잘 못 알아보고 죽인대. 사소한 잘못으로 죽어나간 시종이 열 손가락을 넘어갔고, 호위를 하다 죽은 이들도 꽤 된다고 했다. 사사로이 정원을 짓겠다 주변 백성들도 동원하여 원성이 황궁에 닿았다는 말까지 있었다. 꼼짝도 못하고 생으로 거기 귀신이 되게 생겼으니 홧김에 돌아버린 게 아니냐는 소문이었다.
저는 처음에는 잘못들었나 했다. 이리저리 유배당한 왕족만해도 숱하니, 다른 분 이야길 잘못 들은 모양이라고. 우리 전하가 그럴 분이 아니라 일일이 부정하기를 보름 넘도록이었다. 한데 새로운 말이 계속이었다. 숲에 사람보고 뛰어다니라 하고 활을 쏘았다는데? 히나타는 끔찍스러운 소리에 입을 떡 벌리고 고개를 둘둘 휘저었다. 그러니, 이 분이 무언가 또 착각당할 짓을 하였나. 편지에 요새 무얼로 소일거리를 하시느냐 묻기도 여러 번이었다.
"오빠, 어디 갔다왔…. 어라? 밖이 벌써 더워? 땀 좀 봐."
"응? 아냐. 덥긴. 그냥 뛰어와서 그래. 나츠야, 이거 받아다 이시야에게 줄래? 새로 옷 짓는데 써주시라 사왔거든."
"엄마가 시장 나들이 말라는데 또 다녀왔어? 오빠는 반년을 밖에 있는데 또 반년은 맨 내려갈 준비하는 데 쓰더라."
벌써 꽤 키가 자란 여동생은 종알종알 말이 많았다. 옷감을 넘겨주어도 버티고 서서는 이런 저런 소리 하기를 한참. 그 끝에 한숨을 붙였다.
"그냥 황제께서 주선해주신 대로 토비오나 케이랑 혼인해도 좋았을 걸. 매번 그러기 힘들지 않아? 왜 굳이 거절을 해설랑은…."
"…나츠."
"아 알았어. 그치만…. 미안해."
"어차피 그거 성사도 안됐을 말이야. 나랑 혼례 올리느니 아마 카게야마나 츠키시마 둘 다 차라리 북방에 오랑캐하고 싸우다 죽겠다고 자원나갔을걸? 게다가 나도 전하도 서로 좋…아하는데 무어. 그런 소리 이제 제발 하지마. 응? 특히 야하바 상 앞에서는 더. 알겠지?"
이제 오라비 옷 갈아입게 좀 나가주련. 퉁퉁 부은 볼을 슬쩍 꼬집어 흔들어 주고 돌아섰다. 제법 날이 풀리긴 했는지 저 애 말대로 옷이 땀에 홀랑 젖어 있었다.
"좋아하기는…. 여기 사방에 그 여인네 소문이 짜한데."
꽂히는 말이 매서워 차마 고개를 돌리지도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오빠에게, 전하께 말버릇이 나쁘다고 혼내지도 못하고. 어쩜 좋아. 히나타는 문이 닫히고서야 방바닥에 주저 앉았다.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남쪽으로 쫓겨간지가 벌써 십년이 넘었다는 진왕, 오이카와가 미쳤다는 소문에 꼬리를 댄 이야기는 추문이었다. 히나타에게 누구도 대놓고 묻지 못하여 몰랐지만 그래도 알음알음 귀에 들려와 알게되었다. 숨겨둔 여인이 있다지? 듣기에는 남방인에 생김이 무척 곱다못해 요요하다했다. 그뿐인가. 기루도 아닌 사창가 출신이라 그야말로 밤일에 사람을 쏙 홀린다나. 진왕이 그를 지극히 총애하매, 약혼자가 길을 떠난 새벽에도 연회를 벌이고 오입질을 하였다는 말이 여기저기에 파다했다. 물론 입을 함부로 놀린 작자는 히나타에게 바둑을 알려주다 얼결에 함께 듣게 된 츠키시마에게 경을 쳤다. 야, 헛소문일테니 신경쓰지마. 그러나 이후에도 그 낯뜨건 말은 끝간데를 모르고 계속 들려왔다.
또 봄이 되었으니 길 떠날 채비를 하여야지. 몸뚱이만치 길지 못한 손이 궤짝을 여러 번 여닫았다. 히나타가 타고가는 마차에 실을 궤짝은 주로 야하바 시게루, 오이카와가 믿을만한 이라 일러두고간 사내가 준비해두었다. 늘. 따로 전하께서 요청하셨다며 예전, 진왕부를 정리하던 때 미처 챙기지 못한 물건들을 넣어둔 광에서 무언가를 꺼내 담았다. 매번 심상히 보아넘기던 궤짝들이건만 이번엔 왜 이리도 눈길이 가는지. 히나타 저는 입지도 않는 석류군이며 얇은 사, 비단 줌치에 넣어진 알 굵은 진주들이 서룹기 짝이 없었다. 저 붉은 치마는 전번에도 챙기었더랬지. 이전에는 그저 어디 파시려나보다. 혹은 남방의 성주들에게 선물하여 일신이 조금이라도 편키를 도모하시는갑다. 그리 여기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아무래도요. 값비싼 물건이 그득한 궤짝의 뚜껑을 닫았다.
그길로 히나타가 치달은 곳은 카게야마 가였다. 오늘도 혼자, 열심히 수련을 하고 있는 제 친구. 쟤는 무과에 자꾸 낙방하는 이유가 무술 실력이나 병서 시험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고압적인 지휘 태도 때문이라는데도 영 못알아듣고 칼만 휘둘러대고 있었다. 쪼그려 앉아 그걸 보고있다가, 답답해. 성이 뻗쳐올라 신을 벗어 던졌다. 명중은 못하였다. 허나 방해는 방해였는지, 단번에 일그러지는 표정이 제법 볼만하였다.
"미쳤냐?"
"안 미쳤거든?"
"이게 진짜…. 이게 다 늦은 시간에 왜 우리집에 와서 난린데? 야, 멍청아, 너 또 길 잃어버렸냐?"
저건 내 머리가 지 머리인 줄 아나. 히나타는 욱하는 마음에 아니거든! 소리를 질렀다가 저를 노려보고 선 카게야마를 불러세웠다. 있지, 카게야마.
"있지. 하나만 물어보자."
"아, 뭔데."
"너도…. 그게 진짜라고 생각해?"
"뭐가? 그거라고 말하면 내가 아냐, 멍청아?"
"…진왕 전하에 대한 소문말이야. ㅊ…첩을 따로 들이셨다고…. 너도 들었지?"
차마 떨어지지않는 입을 간신히 떼었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후회했다. 카게야마의 낯에 평소와는 달리, 아차하는 기색이 떠오름을 봤기 때문이다. 여지껏 둘 사이에 고함과 욕설은 있었을지언정 침묵은 드물었는데. 어색함이 가라 앉았다. 공기 중에 부유하던 얇은 먼지같이. 그 생경함이 너무 불편해. 히나타는 짧게 다듬은 손톱으로 제 목을 긁었다.
그래도, 그나마 무던한 성격이 단점이되 가끔은 장점이라고. 먼저 입을 연 건 카게야마였다.
"그럴 수 있잖냐. 뭐. 아예 예상 못했던 바도 아닐 거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귀족은 고사하고 평민 중에서도 돈 깨나 있는 집이면 두엇씩 첩질을 하고 기루에 돈을 수천금씩 쓰는데, 심지어 황족이었다. 작위를 받고 궁까지 하사받은. 거기다 심지어 너랑 그 분은 겨우 일년에 한 번 만나지. 카게야마는 조금 표정이 식긴했지만, 차분한 태도로 그 부분을 짚었다. 그래. 저 목석마저 고개를 끄덕일만큼 당연한 일. 히나타는 여태껏 제가 왔다갔다 쏟은 시간을 돌아보았다. 덜컹이는 마차에서 혹시나하고 바라왔던 소복한 미래. 죄고 있던 끈이 탁 풀린 모양처럼 다리에 힘이 빠졌다.
"너 새삼스레, 왜 그러는데. 설마 몰랐냐?"
"야, 너같으면, 어? 그런 걸 생각하고 살겠냐?"
"첩 안 두는 황족이 드문 ㄱ... 뭐야. 야, 히나타 이 멍청아. 너 울어?"
"안 울어!"
카게야마는 지금 눈 앞의 꼴이 적잖이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주저앉은 히나타를 일으켜 세워두고는 손바닥을 허리춤에 문질렀다가, 금방 관두실 거야. 라는 말같지도 않은 말을 위로랍시고 해댔다. 멀뚱한 얼굴로. 와중에도 그게 히나타의 눈에 들어왔다. 눈치라고는 개뿔 없는게, 그나마 저 둔치가 자신의 눈치라도 보는 게 웃겼다. 하여 히나타는 고개를 한 번 떨궜다가 한참만에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카게야마.
"…너 그냥 나랑 혼인할래?"
내질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