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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얀 손이 마치 석고상 같았다. 미려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손은 누군가 분명 의도를 가지고 만든 작품임이 틀림없다고 히나타 쇼요는 자신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완벽한 형체가 존재할 리 없으니까 말이다. 하얀 손은 상처하나 없이 매끈하고 아름다웠다. 손톱은 마치 반질거리는 진주알처럼 빛이 났고, 저 아름다운 손에 화룡점정처럼 알알이 박혀 있었다. 하얀 손가락은 서서히 서로에게 다가가다 하얀 장갑을 집어 올렸다. 늦은 오전에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에 장갑이 은은하게 빛난다. 대리석같은 그 손은 하얀 장갑 안으로 부드럽게 들어간다. 사부작, 사부작, 피부와 장갑의 면이 맞닿는 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꿀꺽, 히나타는 그 장갑의 표면을 따라가며 우아하지 못하게 침을 꿀꺽 삼켰다. 부모님이 본다면 예의 없다고 크게 호통쳤을 것 같은 행동이었다. 차가운 겨울햇살 아래에 빛나는 장갑의 손날 부분부터 은색의 실로 수가 놓여 있었다. 
   그 단정하고 섹시한 손은 검은 벨벳으로 감싼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히나타가 꽤 오래전 오더를 넣었던 50만 달러에 준하는 시계가 반짝이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히나타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오매불망 기다리던 시계가 아니었다.
   시계를 이리저리 조심스럽게 돌리며 설명해주는 말이 부옇게 뭉개져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손에서 눈을 떼니 이번엔 움직이고 있는 입술에 눈이 간다. 


   “마음에 드십니까?”
   “…네.”
   “예?”


   입술이 의아하게 파르르 떨렸다. 잘 말린 장미색의 아랫입술이 딱 제 취향이었다. 남자는 제 취향에 못을 박고 있었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당신의 미모가요.

 

   “히나타 님! 죄송합니다! 뭐가 문제인지 곧 알아내서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제발 한 번만 더 저희를 믿어주십시오!”


   지점장은 황급하게 달려오다가 약 100m 밖에서부터는 아예 무릎으로 기듯이 절절거렸다. 히나타가 앉아있는 소파에 도달할 때에는 엉엉 울고 있었고. 잘 넘긴 머리와 고급스런 정장이 잔뜩 흐트러졌고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이 눈물에 무너져 내린다. 히나타의 앞에는 이미 지점의 직원 하나가 엉엉 울고 있었고, 이어 합류한 지점장은 울다 말고 다급하게 말을 하며 넙죽 엎드렸다. 쿵, 쿵, 절을 하며 이마를 바닥에 찍자 멍하니 앉아있던 히나타가 깜짝 놀라 벌벌 떨었다.  
   히나타 쇼요는 재벌 3세다. 그냥 재벌 3세도 아닌 총 스물 두개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거대한 그룹의 상속자. 금수저는 물론이거니와 다이아몬드, 플래티넘, 아무 재질이나 골라잡아 쪽쪽이를 만들 애지중지. 금실과 은실로 수 놓은 비단에 쌓여 무척이나 귀하게 태어난 히나타 쇼요는 이 세상이 모두 제 뜻대로 돌아간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제 뜻대로 돌아가는 인생을 살기도 했고. 그렇지만 몇몇 정신 빠진 재벌들처럼 멀쩡한 사람들에게 제 부를 과시하며 모욕을 주거나 멸시하려는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다. 어찌 본다면 오히려 다른 재벌 2세, 3세들과 다르게 머리꼭지부터 발 끝까지 꿀리게 없었다. 히나타의 그 짧은 인생은 사실 그 전까지 운동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괜히 은행에 와서 사람들을 꿇려 놓고 잘못을 빌게 하는 일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어야 할 일이었다.  
   은행 안으로 막 들어오던 츠키시마 케이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하아….”
 

   츠키시마는 제 앞에서 30분째 한숨만 푹푹 쉬는 제 사촌을 짜증스럽게 바라보았다. 오랜만의 휴가에 한가로이 쉬고 있을 때 뜬금없이 제 관리하에 있는 도쿄 중심지의 은행으로부터 연락이 왔길래 짜증스레 피했더니 문자로 제발 살려 달라고 문자가 오는 것이다. 그리고 문자에 따라오는 이름은 제가 무척이나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냥 계속 소파에 늘어져 책이나 읽고 영화나 볼 걸. 저는 우수에 차 있겠다고 생각하겠지만 츠키시마가 보기엔 술에 잔뜩 취한 것 같은 동태눈이었다. 히나타는 다시 한숨을 폭, 쉬었다. 조그만 입에서 폭폭 한숨을 쉬어 봐야 한줌도 되지 않을 것이 뻔한데 제 멍청한 사촌은 끊임없이 한숨을 쉰다. 마치 그러면 상황이 바뀌기라도 할 것처럼.
   서둘러 달려온 은행 안은 난장판이었다. 처음 히나타를 응대한 직원과 지점장은 벌벌 떨며 바닥을 기고 있었고, 은행의 평시 업무를 담당해야할 직원들은 VIP룸 밖에서 거의 울 것처럼 옆에 죄인 마냥 쪼르르 서있었다. 꼭 벌이라도 받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히나타가 당당하게 화를 내고 있었냐, 그건 또 아니었다. 좋은 소파에 앉아 오렌지주스를 마시고 있던 히나타는 격한 지점장의 행동에 다리를 번쩍 들어 소파에 찰싹 달라붙어 벌벌 떨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표정으로 벌벌 떨던 히나타를 구하고 지점장과 직원들을 해산시켰다. 지점장이 나가는 동안에도 히나타 님이 뭐라고 언질이라도 주면 꼭 저에게 알려 달라 울먹이며 말해왔다.


   “그래서 왜 그런 건데.” 
 

   다짜고짜 은행에 와 만 엔 100묶음을 약 600매가량 현금으로 달라고 했던 히나타는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거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벤트 해주려고…. 입술을 비죽이던 히나타는 곧 시무룩해졌다. 이 무척이나 부담스럽고 어이없는 이벤트를 기획한 히나타는 그 상대가 도통 자기를 상대해 주지 않는다고 말하며 칭얼댔다.
   뭐, 이리저리 짜증을 내봤지만 츠키시마도 세상 고민없이 살던 히나타가 온갖 청승을 떨어 대니 퍽 걱정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츠키시마나 히나타나 서로의 성향은 180도 달랐지만 어찌됐든 피가 섞인 친족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놀릴 때는 엄청 즐겁지만 밖에서 쥐어 박히고 오면 씩씩대며 당사자를 찾아갈 정도의 의리가 있는 정도랄까.
히나타는 작은 입으로 한숨을 폭폭 쉬다가 이내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츠키시마, 사랑에 빠진다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인 것 같아…!”
 

   츠키시마는 제 입에 거의 닿을 뻔한 커피잔을 좀 달칵이며 내려놨다. 살살 떨리는 손을 애써 고정하며 츠키시마는 눈을 치켜 올렸다.
   히나타 쇼요는, 적어도 츠키시마가 보기엔 연애에 관심은 커녕 사랑타령과 거리가 아주 먼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히나타의 거의 모든 관심은 운동으로 향했다. 아주 어렸을 적에는 육상으로 달리기를 했고, 초등학생 때는 축구를 하더니,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배구에 온 정신을 쏟았다. 히나타 부부는 본디 자식의 교육에 좀 자유로운 편이었고 말이다. 대학에 와서야 겨우 후계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어디서 나오는 에너지인지 이번에는 대학 야구부에 들어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몇 번 고백도 받아봤다고 말하기는 하는데, 츠키시마가 알기에는 딱히 사귀거나 하는 일이 없었다. 애인과의 다정한 문자보다 아침에 갈 조깅에 더 신경을 쏟는 사람이었다. 
   근데 뜬금없이 사랑이라니. 사랑에 빠지는 일이라니. 심지어 그 일을 귀찮게 나한테 말하다니.
   눈썹이 우그러지는 제 동년배 친족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히나타는 제 말을 하기 바빴다. 위로 보고, 아래로 보고, 옆으로 보고, 백덤블링을 하며 봐도 첫사랑에 빠진 소년 같았다. 하지만 츠키시마는 평소처럼 혀를 살살 굴려 히나타를 놀리거나 비난하는 일 없이 조용했다. 그래도 꽤 친하다고, 첫사랑에 빠진 소년같이 구는 히나타가 꽤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감정이란 제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한 번 좋아한다면 속절없이 빠져드는 성질을 가진 히나타가 만약 거절이라도 당한다면 세상 잃은 것처럼 엉엉 울게 뻔했다. 그래, 마치 운동처럼 말이다. 뭐, 츠키시마는 부스러기라도 남아있는 측은함으로 히나타의 부유함이 적어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를 바랬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것에 누구보다 헌신적인 히나타가 이용당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근데 나는 이제 좋아하는 게 처음이잖아. 그래서 좀 걱정돼. 그게 말이야, 내가 그 사람을 T백화점에 갔을 때 만났는데 말이야….”
 

   상기된 얼굴로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됐는지 설명하기 시작하는 히나타의 이야기를 부러 끊지 않았다. 저에게 조언을 구하러 온 건지, 아니면 들어보니 사실상 그 어떠한 감정의 교류도 없어 보이는 “첫만남”에 대해 자랑을 하러 온 것인지,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히나타는 사랑에 빠져 있었다. 
   츠키시마는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며 커피잔의 끄트머리를 만지작댔다. 히나타도 걱정이지만, 저 무지막지할 사랑을 받아야하는 사람이 안쓰러웠다. 만약 원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고통스러울 거니까. 그래도 가재는 게 편이라고. 츠키시마는 몽롱하게 말을 하는 히나타의 머리에 기습적으로 꿀밤을 먹이고는 카페를 나왔다. 뒤에 부끄럼도 없는 제 친척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안녕하세요!”
   “어서오세요.”


   사랑의 형태는 정말 많았다. 아낌없이 주는 내리사랑, 동등한 선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 친구사이에 생기는 신뢰의 형태도 어떻게 보면 사랑이었다. 애정이 생기는 거니까. 그리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수만 가지였다. 만 명의 사람들이 있다면 만 가지의 이상의 표현이 있었다. 다정한 말일 될 수도 있었고, 스킨쉽이 될 수도 있었고. 그리고 히나타 쇼요의 사랑의 형태는 돈이었다. 
   돈, 얼마나 아름다운 글자의 형태인가. 실물이라면 더 직접적이고 광범위한 효과를 발휘했다. 사랑에 꼭 돈이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추운 곳에서 감자칩을 먹는 것과 따듯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코스요리를 먹는 것이 같은 기분일 수 없는 거니까. 그런 면에서 히나타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금수저, 아니 다이아몬드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으니까.
   매장 입구에 고급스런 정장을 걸친 매니저가 커다랗게 소리치며 들어오는 히나타에게 꾸벅 인사를 했지만 그는 히나타가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는 히나타의 모습에 매장의 매니저는 누굴 찾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사실 이 어린 손님은 근래 매장에 와서 직원 한 명에게 아주 적극적인 구애를 하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매니저는 서둘러 다른 직원에게 아카아시 케이지의 행방을 물었다. 열렬한 구애의 주인공말이다. 구애를 하고 있는 사람이 워낙 보통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지. 히나타가 이 매장에 발걸음 한지 겨우 2주였지만 매상은 올해 그 누구보다 가장 많이 올려주었다. 곧 크리스마스가 시작되 벌써부터 연휴를 노린 상품들과 이벤트들을 기획하고 있는데 역시나 히나타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기도 하고. 아무튼 기분 거슬려 봐야 좋을게 없는 초특급 VVVVVIP였다. 
   아카아시가 매장 뒤편 창고에서 벨벳으로 치장된 박스를 가지고 나오다 히나타를 보고 허리를 굽혔다. 마침내 제 사랑과 마주한 히나타는 신나게 뛰어가 강아지처럼 주위를 맴돈다. 


   “오셨군요. 차를 드시겠습니까?” 
   “네! 그리고 같이 마실 수 있나요?”
   “규정상 직원은 손님과 차를 같은 자리에서 마실 수 없습니다.”
   “그럼 오렌지주스요!”
   “…규정상 직원은 손님과 겸상할 수 없습니다.”

 

   얼굴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로봇처럼 대답하는 아카아시를 보며 매니저는 고개를 저도 모르게 절레절레 저었다. 
   이 T백화점에 자리한 매장을 휘젓고 다니며 가장 작은 담배케이스부터 어디다 쓸지 모르는 괴상한 옷까지 몽땅 사가며 제 부를 과시하는 소년 같은 남자가 찾아오기 시작한 건 위에도 말했듯 정확히 2주 전이었다. 후드티와 청바지를 입고 온 손님은 첫 날, 매장의 카운터를 보고 있던 매장의 직원인, 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알바생인 아카아시 케이지에게 충격적인 프로포즈를 했다.
   매니저야 저 유명한 히나타 쇼요를 알고 있으니 입이 떡, 하니 벌어졌지만 그렇지 않아도 소문이 자자한 아카아시 케이지는 얼굴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회원번호가 있냐고 태연하게 물어봐서 매니저의 턱이 그날 다시 붙는 일은 없었다. 
   히나타 쇼요가 미디어만 본다면 누구나 알 수 있을 법한 거대한 자본의 가장 꼭대기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아카아시 케이지는 한창 자본의 가장 밑바닥을 기는 중이었다. 아카아시 케이지의 사정이라면 매니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태어나자 마자 버림받은 고아여서 법적성인이 될 나이까지 고아원에 의탁하며 살았다고 했다. 공부하는 걸 좋아해 사교육 하나없이 대학교에 들어갔지만 장학금만으로 도저히 생활비가 감당이 되지 않아 지금 1년째 휴학 중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머리가 얼마나 좋은지, 학교를 다니면서 거의 모든 시간에 일을 해야 했지만 학교에서 수석을 놓친 적이 없었다. 장학금을 매번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머리뿐만 아니라 얼굴도 꽤 잘생겼다. 애초에 이런 명품이나 커스텀 제작을 하는 매장에서는 외모를 꼭 가려 일을 할 사람을 뽑았다. 연예인처럼 화려하게 생긴 사람을 원하는 게 아니라 단정하고 차분한 외모를 선호했고, 아카아시는 꼭 오래된 먹같은 인상을 풍겼기에 매니저는 그를 단번에 채용했다. 채용을 해보니 몸가짐은 단정하고 입은 무거웠기 때문에 많은 손님들에게 호감을 받을 수 있었다. 아카아시가 이 매장에서 풀타임을 하기 전 파트타임 할 때는 일부러 그의 타임에 맞춰 방문하는 단골 손님까지 존재했었다.
   매니저가 알고 있는 아카아시는 돈이 절실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고 정적인 사람이었다. 히나타 쇼요와 차이점을 찾자면 3박 4일간 사람을 붙잡고 말을 할 수 있을만큼. 
   아카아시는 오렌지주스 한잔을 유리컵에 따랐다. 매일 오렌지를 공급받아 아침마다 바로 갈아 건강한 설탕을 넣은 천연 주스였다.


   “아카아시 상! 그럼 끝나고 시간 있어요?”
   “끝나고 다른 일을 하러 갑니다. 주스를 편안히 드실 수 있게 소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컵받침에 유리잔을 올린 아카아시는 요령 좋게 자기 주변으로 뱅글뱅글 돌고 있는 히나타를 이끌어 소파로 안내했다. 흥분해서 날뛰던 VIP를 얼마나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제 뜻대로 휘두르는지, 힐끔힐끔 쳐다보던 매니저가 박수를 칠 뻔했다. 얼떨결에 아카아시의 손을 잡은 히나타는 수줍은 소년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제가 그 가게를 살게요.”
   “…….”

 

아카아시는 말을 하지 않고 오렌지주스를 건넸다.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히나타는 곧 얼굴이 빨개지더니 필사적으로 변명을 해대는 게 아닌가. 
 

   “저, 저 그렇게 상식이 없지는 않아요! 가게를 사는게 아니고 그냥 그 시간을 살 거라는 소리인데! 아카아시 상, 저 진짜 그렇게 상식 없는 애 아닌데, 그렇게 주위에 폐를 끼치지 않아여! 정말이에요….”
   “예. 쿠키 드시겠습니까?”

 

히나타가 하는 말을 넘긴 아카아시는 히나타를 소파에 앉히고 옆에 작은 사이드 테이블 하나를 가져왔다. 그 위에 오렌지주스를 놔두고는 스테인리스로 만든 빨대를 꽂아주었다. 자연스럽게 아카아시가 밀어준 컵의 빨대를 쪽 빨며 히나타는 칭얼거렸다.
 

   “으응, 근데 제가 아카아시 상 일이 끝날 때까지 가게 사면은요, 그러면 제 옆에 있어 주실 수 있나요?” 


   티테이블의 서랍에서 하얀 종이와 레이스로 포장된 쿠키박스를 꺼내든 아카아시는 자연스럽게 히나타의 앞, 비스듬한 방향으로 무릎을 꿇고 과자박스의 레이스를 풀었다. 소파에 나란히 앉지 않는 것은 규칙이었다. 예를 들어 카탈로그를 귀가 좋지 않거나 눈이 좋지 않은 손님에게 설명해주는 등의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직원들은 손님과 같은 의자에 앉을 수 없었다. 아카아시는 그래서 카펫이 깔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히나타는 당연한 듯 받아들였다. 


   “일을 할 때에 정해진 규정 의외의 것들은 할 수 없습니다.”


   힝힝거리던 히나타에게 열려진 과자박스를 조심스레 들어올려 하나를 집게하자 히나타는 익숙하게 집어 올려 입으로 가져갔다. 사실 빤히 보자면 모든 사람들에게 허물없이 굴 것 같은 히나타는 대접받고 보살펴지는 것에 누구보다 익숙해져 있었다. 자기가 귀하게 대접받는 다는 사실 자체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아카아시는 히나타에게 과자를 더 권했다.
   정말 로봇인 줄 알겠네. 매니저는 억만장자의 플러팅을 단단하게 튕겨내는 아카아시야 말로 철로 만든 사람이 아닌지 의심했다. 생각해보면 아카아시가 이해되기도 한다. 사람의 사랑은 돈만으로는 생겨나지 않았다. 아, 물론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는 있지. 솔직히 매니저가 아는 아카아시의 사정을 생각한다면 어째서 저 무지막지한 플러팅을 받아주지 않는 걸까 의심도 들었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돈에 넘어가는 것만큼 얄팍한 사랑이 어디에 있겠는가? 흠, 근데 히나타 쇼요만큼 돈이 있다면 또 말이 틀려지지. 스스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매니저가 저 혼자 물어보지도 않은 숭고한 사랑과 돈에 대하여 갈팡질팡하며 둘을 맴돌고 있었을 때였다. 아카아시가 준 쿠키를 시무룩한 표정으로 와구와구 씹어 먹던 히나타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 쿠키에 아몬드 맛이 나요. 맛있다.”


   상기된 얼굴로 쿠키에 흥분하는 히나타를 보던 석고상의 얼굴에 금이 갔다.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며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부정적인 감정이었겠지만 이 젊은 남자의 눈에 놀랍게도 부드러움이 깃들었다. 매끈하게 칼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던 얼굴에 균열이 생긴 거다. 매니저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면접을 볼 때에도 너무 침착하고 단정해 사실상 본사에서 감사가 나온 줄 알았던 아주 당돌한 대학생이었다. 매사 침착한 태도는 손님들에게 신뢰를 주었지만 인간미는 없었다. 그래, 꼭 석고상 같았지.
   눈을 부드럽게 휘며 웃는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막상 그렇게 만든 장본인은 쿠키를 집어먹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아카아시 상도 하나 먹을래요?”
   “손님과의 사적인 식사는 규정상 금지되어 있습니다.”

 

   히나타가 얼굴을 내려 자신을 보는 순간 거짓말처럼 표정을 지운 아카아시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름이 없었다. 지금 다른 반응을 보이는 건 지금까지 쭉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던 매니저뿐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억울한 표정을 짓던 매니저는 슬금슬금 카운터를 지나 창고 쪽으로 몸을 내뺐다. 
 

   “힝. 그럼 공적인 식사는 되는 거예요?” 
   “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히나타를 올려다보던 아카아시가 의아한 듯 눈을 마주쳐왔다. 아카아시의 눈동자는 히나타가 그의 손 다음으로 사랑하는 거였다. 옛날 헬리콥터를 타고 숲 위로 떠올랐을 때의 수해樹海를 히나타는 잊지 못했다. 화창한 여름날에 보았던 청량함 보다는 좀더 어둡고 고요한, 아주 묵직한 색이었다. 눈동자라는 아카아시는 그 아름다움을 꼭 인간으로 형상화한 사람 같았다. 조금 흔들리는 눈동자를 따라가던 히나타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아카아시의 손을 잡았다. 하얀 면장갑을 낀 상태였지만 이 아래에는 히나타가 그에게 반하게 된 결정적인 예술품이 존재했다. 서툰 제 손에 아주 작은 상처라도 날까 흥분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VIP 전용 파티가 열리지 않아요? 그때 아카아시 상도 당연히 오겠죠?”
   “네…, 이 백화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행사니까요. 하지만 전 그날에도 맡은 바 임무가 있습니다, 히나타 님.”

 

   제 손을 만지작거리는 발칙한 작은 손을 아카아시는 굳이 말리지 않았다. 히나타는 수줍게 웃어 보였다.
 

   “제가 힘내서 백화점에서 가장 많이 살게요! 원래 이 백화점 VIP 선정기준을 명수가 아닌 퍼센트로 따지잖아요. 제가 엄청 열심히 힘내서 상위 매출을 다 차지하면 저 밖에 손님이 없으니까 아카아시 상이랑 저랑 오붓하게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길 수 있을 거예요!”
 

   물론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였다. 전체매출의 상위 10%를 초대하는 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하는 특별손님이 있는 법이었다. 단순한 이익에 관련된 손님뿐만 아니라, 백화점은 명성이 있거나 특정 일에 깊숙하게 관련된 특별한 손님, 혹은 봉사활동 단체도 초대했다. 크리스마스 파티는 일 년을 마무리하는 중요한 행사였고 무엇보다 생색내기에 아주 적당한 시즌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니까 아무리 히나타가 홀로 이 백화점에서 상위 10%를 차지한다고 해도 그 혼자 파티장에 덜렁 있지는 않을 거란 소리다.
   아카아시 케이지는 평소처럼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거라고 말을 하려했다. 저의 손을 쓰다듬는 이 철부지 금수저에게 규정이 있다고 못을 박으려고 했었다. 원래의 자신처럼, 원래의 아카아시 케이지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변덕이었다. 
   그 상기된 표정을 보지 않았더라면. 기대에 가득 차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지 않았더라면. 속눈썹 아래의 눈꺼풀에서 흘러내리는 그 수줍음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냥, 언제나 그렇게 히나타에게 커다란 기대를 가지지 않으려고 했다. 아몬드 맛이 난다며 세상물정 모르는 얼굴로 환하게 웃는 것만 보지 않으려 했다면 오늘도 마찬가지였는데.

 

   “…기대하겠습니다.”
 

   사실 반정도는 너무나 사랑스러워 충동적으로 행한 일이었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눈동자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말을 하는 지금도 사실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히나타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곧 툭, 하고 눈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 남자를 기쁘게 한 것은 확실했다.

 

   “매니저 님. 또, 또, 그 소리하신다.”
   “아카아시가 누군데 저 도련님의 마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요?”

 

   매니저가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퍽퍽 치댔다. 아니, 아카아시 웃는 걸 니들이 가서 보라고! 아카아시가 웃는다고요? 하하, 매니저 님, 농담도 참.
 

   “그 둘은 사랑을 하고 있다고!”
   

   둘 다 모르지만 아무튼 하고 있다고! 믿어 달라고! 매니저가 답답해 제 가슴을 치고 있는 것을 매우 한심하게 본 동료들은 각자 제 할 일을 찾아 갔다. 도련님을 위해 피해줬지만 매장을 너무 오래 비워 놓을 수 없어서였다. 얼굴에 명백하게 들어나 있는 무시를 보고는 또다시 억울해졌지만 차마 제 브랜드를 위해 소리를 지를 수 없는 매니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다음날 히나타의 백화점 인수소식이 신문의 첫 장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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