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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나타는 감자를 좋아했다. 동글동글, 생긴 것도 귀여운 감자는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랐고 무엇보다 야생에서 많이 자랐다. 소작농의 아들인 히나타가 어렸을 적 영주의 땅에서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산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작물이었다. 운이 좋다면 고구마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맛이 달콤한 고구마는 대부분 나이가 많은 형들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새벽에 나가 밤에 돌아올 때 옆구리에 낀 소쿠리에는 겨우 감자 몇 알이 다였다. 그래도 감자는 훌륭했다. 손쉽게 쪄 먹어도 되고, 끓는 스프에 넣는다면 물이 걸쭉해져 씹는 맛이 있었다. 하루하루 배를 곪는 일이 있는 고달픈 소작농의 작은 아들에게 무척이나 소중했다는 말이다.
   음, 그렇다고 이렇게 둘러 쌓일 정도 까지야. 히나타는 제 주변에 잔뜩 놓인 감자들을 바라보았다. 감자에 발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바라만 본다면 쌓여 있던 감자가 저절로 깎이는 것도 아니니 히나타는 옆에 두었던 작은 칼을 다시 들었다. 농노의 자식들은 열다섯이 되면 제 부모처럼 영주에게 일정량의 노역을 제공해야 했다. 물론 히나타 쇼요도 같은 처지였다. 아마 아버지처럼 영주의 이름아래 정해진 구역을 배정받아 일을 하게 되겠지. 히나타의 생일이 지나고 몇 일 후에 히나타의 이름을 영주성에 내러 가던 중에 마차사고로 부모님이 죽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급하게 가던 마차는 꽤 멀리 떨어진 시라토리자와의 전령이 타고 있던 마차로, 영주의 명을 받고 이동하던 중이었다. 때문에 본디 이 비극적인 일에 대해 끽소리도 못해야 하는 히나타로써는 억울할 뿐이었는데 운명인지 장난인지, 전령의 주인이던 시라토리자와의 영주 우시지마가 뜻밖의 명을 내렸다.
   시라토리자와의 영주는 배정받을 땅도 없이 다른 사람 밑으로 들어가야만 했던 히나타 쇼요를 거두어 농노의 서류를 태워주고 자유민으로 만들어 제 성안의 잡부로 두었다. 실로 엄청난 신분상승이라 할 수 있었다. 자유민은 소작농처럼 평생 영지에 묶여 있지 않아도 되고, 봉급도 직접 받았다. 아주 고된 노동을 일단 직접 하지 않는 것만 해도 큰 이득이었다.  
   기름지고 날씨가 좋은 시라토리자와 영지민들의 주된 수입은 농사였다. 논과 밭에는 작물이 아주 단단하고 건강하게 자랐다. 과수원의 과일들은 과육이 부드럽고 달기까지 했다. 대부분의 작물은 영지의 이름아래 아주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거나 왕에게 납품이 된다. 농수로로 끌어오는 강의 물이 맑았고, 사람들은 건강했으며, 영주의 성향은 곧고 공평했다. 몇 안 되는 옷을 품에 꼭 끌어안고 영지에 도착했을 때 받은 인상도 마찬가지였다. 공기는 무척이나 평화로웠고, 날은 좋았으며, 거리는 깨끗하고 맛있는 냄새가 났다. 세상 모든 슬픔을 짊어진 사람처럼 울어 눈이 부운 히나타만이 이 거리의 이질적인 존재 같았다. 빵냄새가 솔솔 나는 거리를 지나 마침내 영주의 성에 도달했을 때 히나타는 바쁜 영주를 대신해 그의 기사 한 명의 명으로 부엌의 잡부로 배정되었다.
   갑자기 툭 굴러 떨어진 히나타에게 텃새를 부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영지민과 성의 사람들은 공정한 영주의 명 아래에 여유롭게 살고 있었고 대부분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해 고아가 된 히나타에게 잘 대해줬다. 물론 마냥 좋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밤 늦게까지 감자만 깎는 신세가 되긴 했지만.
   사각사각 손 아래에 갈리는 감자는 저장한지 조금 오래된 거긴 하지만 엄연히 올해 햇감자였다.
   영지에 오고나서 히나타는 처음으로 좋은 요리를 대접받았다. 삼시세끼 따듯한 스튜나 스프가 나오고, 절기에 맞는 채소들과 아주 약간의 과일도 먹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좋은 쌀로 만든 하얀 쌀밥이나 하얀 빵이었는데 단연코 이곳에서 처음 먹어본 음식이었다. 가끔 운이 좋다면 스튜나 스프에 커다란 고기덩이까지 올라올 때가 있었다. 축제때는 그 귀한 연유를 묻힌 딸기를 무려 세 개나 먹기도 했었다. 정말 황금의 땅이라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딸기를 한 움큼 베어 물며 히나타는 막연하게 감탄했다. 수도와는 많이 떨어져 있지만 비옥한 토지와 좋은 날씨, 천혜의 자연을 선물 받은 시라토리자와는 막강한 부를 가지고 있다고 소문이 자자했다. 자기같은 부엌데기에게도 이런 귀한 음식이 돌아오는데, 그럼 대체 귀하시고 현명하신 영주님은 무슨 음식을 먹고 사는 걸까.
   다른 감자를 들어올리는 순간 누가 부엌의 문을 열었다.


   “어?”


   영주성의 요리를 책임지는 앞주방은 훨씬 크고 넓었다. 그에 반해 뒤쪽에 있는 이 작은 부엌은 있을 물건은 다 있었으나 대부분 재료를 손질하거나 요리사들이 잠시 쉬는 곳으로 이용됐다. 이렇게 저녁 늦게 찾아오는 사람은 간혹 야식을 만들어 먹기 위한 하녀들이나 하인들이었다. 때문에 히나타는 부엌의 문이 열릴 때 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놀라지 않았는데 부엌 안으로 들어오는 낯선 남자의 모습에 눈을 크게 치켜 떴다. 
   남자는 무척이나 키가 컸다. 아마 히나타보다 곱절은 큰 것 같았다. 짧은 머리에 정말 다부진 몸을 하고 있는 남자는 단정하지만 흙이 조금 뭍은 작업복을 입고 있었고 손에는 묵직해 보이는 천보따리가 들려 있었다. 쌓인 감자더미 사이로 히나타를 발견한 건지 당당히 들어오던 남자가 걸음을 잠시 멈췄다가 얼굴을 작게 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히나타에게는 낯선 이였지만 남자는 당황하거나 크게 놀라지 않았다. 들고 온 보따리를 탁자 위에 올려 두고 찬장을 익숙하게 뒤질 뿐이었다. 외부인은 일단 아닌 것 같았다.
   힐끔힐끔, 짧게 잘린 남자의 머리카락을 훑으며 히나타는 감자를 다시 깎았다. 남을 몰래 쳐다보는 건 무척이나 무례한 일이야, 스스로 다독여도 보지만 한 번 일어난 호기심이 도통 꺾이질 않는다. 사실상 히나타는 이 곳에 와서 많은 사람과 마주칠 일이 아주 적었다. 몇일 전 일 년 중 가장 큰 축제라는 추수제에 잠시 마을에 나갔다 온 것을 빼면 히나타가 마주칠 사람은 아주 제한적이었다. 물론 하도 빨빨거려 돌아다니는 통에 적어도 잡무를 하는 사람이면 히나타와 안면을 터버렸겠지만 영지를 관리하는 사람들이나 기사단 사람들 등 저보다 한 계급이라도 높다면 볼 수가 없었다. 몸이 무척이나 다부지고 좋은 옷을 입고 있는 걸 보니 적어도 이 성에서 꽤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기사님이신가. 히나타가 남자의 뒤통수를 저도 모르게 빤히 보며 곰곰이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찬장을 뒤지던 남자가 갑작스럽게 뒤를 돌며 저를 빤히 바라보던 히나타와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너는 왜 이 시간까지 감자를 깎고 있는 거지? 성의 사람들은 대부분 11시가 넘어가면 특별한 일을 제외하고 보통 일을 하지 않도록 되어있다.”
   “헉.”


   등잔의 불빛에 남자의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꾹 다문 입은 고집스러워 보였고 짙은 눈썹과 눈매가 히나타의 연약한 심장을 떨리게 했다. 저가 훔쳐보고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인지 내려다보는 저 눈동자가 서늘했다. 저보다 큰 사람이라면 일단 겁부터 먹고 보는 히나타의 모가지가 점점 쪼그라들었다.


   “시, 시킨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내, 내일까지 못하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그게,”


   꾸르륵. 약하게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히나타가 가까스로 말을 꺼냈는데 세상에, 눈치 없는 위장이 제 주인의 일생일대의 위기도 알아보지 못하고 난리를 친다. 최근 생전 보지도 못할 따듯하고 고급스런 음식들로 위장에 기름칠을 하다가 오늘 딱 한 끼, 텃새로 저녁을 굶었는데 그새 참지를 못하고 사고를 치다니. 히나타는 눈을 꼭 감았다. 눈꺼풀 안쪽의 컴컴한 심연이 꼭 제 미래처럼 보였다.


   “…….”


   눈 앞의 남자가 체면을 중요시한다면 뭐라고 문책을 했어도 두 번은 했을 법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히나타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화가 잔뜩 난 얼굴 대신 커다란 등 하나만 조리대 근처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


   남자는 일단 화로에 불을 붙였다. 남아있는 불씨로 익숙하게, 그리고 순식간에 불을 되살린 남자는 그 위에 커다란 솥단지를 걸어 놓았다. 깊이가 깊었다. 남자는 이내 제가 가져온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는데, 훤하게 뚫린 조리대 위에 있어서 무엇을 가져왔는지 훤하게 보였다.
   분명 첫수확을 했을 햅쌀, 싱싱하고 푸릇푸릇한 양배추와 당근, 양파, 정확히 알 수 없는 하얀 가루덩어리, 우유병, 그리고 커다란 고깃덩이였다. 하나같이 싱싱하고 귀한 재료였기 때문에 히나타는 괜히 감자더미로 슬그머니 엉덩이를 이동했다. 
   이 부엌이 퍽 익숙한지 남자는 조리도구를 척척 잘 찾아냈다. 도마와 칼을 꺼내 들고, 제 옷에 튀지 않게 앞치마를 골랐다. 음, 덩치가 워낙 컸기에 앞치마의 끈을 간신히 걸쳤다. 정말 여유롭게 남자는 요리를 시작했다. 커다랗고 적당히 단단한 양배추도 남자의 손 앞에 두부처럼 갈라졌고 듬성듬성 잘렸다. 당근도, 양파도, 모두 어슷하게 썰었고, 쌀도 잘 씻어 소쿠리에 불리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감자더미 속에 거의 파묻힐 뻔한 히나타의 시선을 끈 것은 커다랗고 싱싱한 고기였다. 비록 가축을 길러 고기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장 귀한 음식이었다. 가축을 기르고 고기를 얻는 데에는 정말 엄청난 양의 사료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축제때나 겨우 볼 수 있을 법한 양에 히나타의 입이 점점 벌어진다. 남자는 귀한 고기도 양파와 양배추와 마찬가지로 참 거침없이 잘랐다. 특이한 점은 고기를 두툼하게 썬다는 점이었다. 히나타가 입을 크게 벌려야 겨우 삼킬 수 있는 그런 두툼한 고기 말이다.
   꼬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아 보지만 소리까지 어찌할 수는 없었다. 고기를 썰던 남자가 휙, 하고 히나타를 돌아본다. 


   “배가 고픈가?”
   “네? 아니, 저기, 그게.”


   슬슬 앞으로 다가가던 엉덩이를 다시 감자더미 사이로 슬쩍 밀어 넣으며 히나타가 우물쭈물 대답을 미뤘다. 영주성은 갖 자유민이 된 저보다 높은 사람들이 한가득이었다. 소작농으로 살았다면 평생 보지 못할 사람들 말이다. 말이라도 잘못했다가 목이 뎅겅 잘라지는 상상을 사실 새가슴 히나타는 매일 하고 있었다.
   대부분 마주치는 사람들이 퍽 상냥해도, 꿈도 꾸지 못할 음식을 매 끼니 먹는데도, 히나타 쇼요는 몇 주 전 부모를 잃어 이 낯선 곳에 도착한 고작 열 다섯이었다. 최근에는 꽤 집요한 괴롭힘을 받고 있는.
계속 울어대는 배가 불쌍하지만 서둘러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와카토시는 곧 감자더미 사이로 묻힐 것 같은 작은 소년을 가만히 내려봤다.
   흙이 조금 묻은 얼굴은 앳되고, 또 겁에 질려 있었다. 성에서 처음보는 아주 낯선 얼굴. 추론을 해보자면 몇 가지가 남지 않는데, 사실 와카토시는 소년이 누가 되었던지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냥 그가 깎고 있는 감자가 탐이 날 뿐이었다. 그리고…, 그리고 소년이 배가 너무 고파 보였고. 그래서 평소라면 하지 않을 권유를 했다. 정말 나열한 이 이유뿐이었다. 


   “감자 몇 알을 빌려주면 음식을 주지. 거래하는 게 어떻겠나.”


   감자더미의 소년이 슬그머니 눈을 마주친다. 커다란 눈에 공포대신 햇살이 차오른다. 보석같이 반짝이는 아주 예쁜 눈이었다.

   “고기는 어디서 난 거예요? 이, 이거 설마 훔쳐온 건 아니죠?”


   그래서 자신의 어디가 그렇게 안심이 되는지 묻고 싶었다. 저 말 한 마디에 고개를 크게 끄덕인 소년은 더 이상 자신을 두려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까는 무서워서 감자에 파묻혀 사라질 것 같더니.
남자는 본격적으로 주변을 서성이는 히나타에 칼을 다시 잘 쥐었다. 


   “훔친 게 아니다. 내가 사냥한 거다.”


   감자도 다른 재료와 마찬가지로 듬성듬성 썰었다. 감자 몇 알은 칼질이 익숙한 손에 순식간에 동강나 버렸다. 대나무로 둥글게 짠 소쿠리에 감자, 양파, 고기, 구분할 것 없이 마구 담은 후 남자는 충분히 달궈진 솥에 다가가 몽땅 부었다. 달아오른 솥에 야채와 고기 할 것 없이 탈탈 털어 넣고 난 후 양동이에 담아 놓은 식수를 겨우 잠길 정도로 부었다. 히나타는 그의 곁에 바짝 다가가 그가 하는 행동을 샅샅이 살폈다. 


   “그러니까, 그, 기사님, 그, 제가 뭐라고 부를까요?” 


   사냥을 했다는 소리는 히나타에게 좀 더 명확한 판단을 내리게 도와줬다. 성에 살고있는 사람들 중 사냥을 허락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히나타의 기억속에 떠오른 사람이라고는 성에 도착하는 첫날 저에게 영주의 명을 전해주던 신경질적인 남자 한 명 뿐이었다. 
   남자는 깊은 솥에 물을 다 쏟고 텅 비어 버린 양동이를 옆에 내려놓으며 조금 머뭇거렸다.


   “와카…토시.”
   “아! 네! 와카토시 님!”


   남자는 또 한동안 미묘한 시선으로 히나타를 내려다보았다.
   히나타는 물 안에 동동 떠다니는 재료들을 바라보았다. 와카토시라는 남자의 칼질은 훌륭했지만 요리에 깊은 조예가 없는 히나타가 보기에도 그의 요리솜씨가 썩 좋지 못했다. 보통 물을 넣기 전에 기름에 한 번 볶기라도 하던데, 귀찮아서 그런 걸까. 물론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저야 기름에 볶아 먹던 물에 그냥 그대로 삶던 뱃속으로 들어가기만 한다면 감지덕지기 때문이다. 
   물은 금세 끓어올랐다. 와카토시는 병에 들어있는 우유와 하얀 가루를 가져와 역시 몽땅 쏟아 넣었다. 딱히 저어주거나 하는 일이 없어 옆에서 어물정거리는 히나타가 대신 커다란 나무 국자로 살살 젓기 시작했을 때 말리지 않았다.
   처음엔 그냥 도와준다고 옆에서 알짱거리던 히나타는 와카토시가 소금통을 통째로 쏟으려 할 때부터 말이 급속도록 많아졌다. 후추를 갈 때는 잔소리를 시작했고, 무슨 허브를 넣어야 할지 같이 고민해주었다.


   “시라토리자와에서 태어나셨군요.”


   와카토시는 천천히 불을 죽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튜가 눌러 붙지 않게 살살 젓고있는 히나타에게 어느새 제가 태어난 장소까지 술술 말해버린 와카토시가 순간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무표정한 얼굴 위로 살짝 떠오른 당황스러움을 눈치채지 못한 히나타는 바닥에 살짝 눌러 붙은 재료를 살살 밀었다.


   “저는 유키가오카에서 태어났어요. 음…, 몇 일 전에 일이 생겼는데 영주님의 은혜로 여기로 오게 됐어요.”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솥단지 안의 음식은 감자와 고기가 잔뜩 들어간 크림스튜였다.


   “사실 기쁜 일로 오게 된 건 아니라 우울했지만, 그래도 여기와서 행복한 것 같아요. 그 전의 영지에서는 사실 계속 소작농으로, 그러니까 농노로 살아야 했거든요.”


   한참동안 푹 익힌 재료들은 거의 부서질 듯 흐물거렸다. 루와 우유, 그리고 버터를 잔뜩 넣어 만든 스튜는 국물음식 답지 않게 무척이나 고급스러웠다.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 같아요, 시라토리자와는.”


   히나타는 솥 안에 두고 있던 시선을 내려 쪼그려 앉아 저보다 시선이 낮은 와카토시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와카토시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숯을 꺼내 화로에 담다 말고 히나타를 쳐다보았다.  


   “그 모든 불행이 슬프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여기에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히나타는 빙그레 웃었다. 
   와카토시는 화로에 나머지 숯을 담아 아담한 나무 식탁 가까이에 놓았다. 화로의 숯은 한껏 달아올라 있어서 아마 두 사람이 음식을 먹는 동안에는 따듯한 공기를 유지해 줄거다.


   “근데 저거 햅쌀이죠? 왜 닦아 놓으신 건가요?”
   “…….”


   와카토시는 묵묵부답으로 말이 없었다. 햅쌀은 커다란 그릇에 담겨 착실하게 물을 먹고 있었다. 대답을 하는 대신 나무를 깎아 만든 커다란 나무그릇을 히나타에게 건네 주었다. 
   차마 스튜에 넣으려고 가져왔지만 히나타가 깎고 있는 감자가 너무 탐이 나서 요리에 쓰지 못했다는 말이 너무 머쓱한 나머지 말하려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와카토시가 답이 없자 히나타도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곤란해 보였기 때문이다.


   “우와, 진짜 맛있어 보여요! 이렇게 큰 고기는 처음 봐요!”


   커다란 나무 국자로 크게 퍼 올린 스튜는 꾸덕꾸덕하여 물기가 거의 없었다. 커다랗게 자른 재료가 유독 맛있어 보인다. 하얀 김이 포슬포슬 흩어지는 따듯한 스튜 두 그릇은 부엌 안의 작은 식탁으로 금세 옮겨졌다. 
   나무로 깎은 수저를 들고 있는 히나타는 퍽 애가 닳아 보였다. 먹어도 되나 눈치를 보는 그에게 와카토시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커다란 고깃덩이 하나를 들어올린다. 아직 뜨거워 바로 삼키지는 못하고 후후, 불다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삼키는 모습을 봐서 그런 것 일수도 있었다. 와카토시는 잠시 그 모습을 보았다.
   히나타 쇼요는 음식을 먹을 때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커다란 고기와 감자, 그리고 들어있는 야채까지, 까다롭게 입을 가리는 편도 아니었고. 스튜를 담아 놓은 그릇은 무척이나 컸는데, 제 양껏 펐으니 먹을 수 있으리. 다만, 홀쭉하니 내린 볼살이 그저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그 모든 불행이 슬프지 않은 건 아니겠지. 
   하지만 히나타는 11월의 늦은 밤, 따듯한 스튜를 먹으며 무척이나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자꾸만 눈을 마주쳐오는 낯선 남자에게 허물없이 굴며 말이다. 와카토시는 그제서야 제 몫의 스튜를 떴다. 
   자정이 다 된 11월의 밤은 싸늘했지만 발치에 놓아둔 화로는 따듯했고, 등유를 잔뜩 부은 등이 아늑했고, 무엇보다 뜨끈한 스튜는 맛이 무척이나 좋았다. 아늑했고, 무척이나 사랑스러운 공기가 가득했다. 그 밤에 와카토시와 히나타는 생각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뭐, 당연하게도 이 배부르고 따듯한 밀회는 그 다음날에도 지속됐다. 
   다음날 늦은 저녁에 만난 둘은 불렸던 쌀로 하얀 쌀밥을 해먹었다. 좀 오래 불린 감이 있었지만 히나타가 물을 정확히 맞췄기 때문에 고슬고슬했다. 와카토시는 이번에도 주먹만한 고기를 가져왔고 양파와 감자, 그리고 매운 고추를 듬뿍 넣고 간장과 설탕을 넣어 졸였다. 어제처럼 와카토시는 간을 맞추는 것에 어려워했기 때문에 히나타가 옆에서 도와줬다. 그저 얻어만 먹을 수는 없었기에 히나타는 적당히 얻을 수 있는 배춧잎 몇 장을 주어 왔다. 온전한 겨울이 오기전 시작된 수확철은 성과 영지 사람들을 풍족하게 했다. 무 몇 개와 버리려고 한 무순도 얻을 수 있었고 양파같은 흔한 작물이야 아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히나타는 어제 스튜를 끓을 때 썼던 솥에 물을 가득 붓고 된장을 풀었다. 덤벙덤벙 자른 배춧잎과 채소를 몽땅 넣고 한 번에 끓였다. 간을 봤을 때 너무 싱거운 것 같아 소금을 풀었다. 와카토시가 칼질은 잘하지만 요리에 서투른 부분이 있는 것처럼, 히나타도 간은 잘 맞췄지만 요리에 특출한 재능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익숙한 것뿐이지. 히나타의 된장국의 야채는 너무 익혀 거의 씹지 않을 정도로 물렁거렸다. 
   국을 한 술 뜬 와카토시와 히나타는 눈이 마주치자 웃어버렸다. 
   그 다음날에는 옥수수 가루를 잔뜩 넣은 떡을 해먹었다. 그 다음날에는 배가 고프지 않아 설탕과자를 찍어 눌러 만들어 먹었고. 커다란 고기를 통으로 구워 먹기도 했다. 아직 파릇한 채소를 가져와 상큼하게 무쳐 먹거나 데쳐서 볶아 먹었다. 
   보리가루로 밤과 잣을 듬뿍 넣은 떡을 쪄 먹기도 했고. 어제는 밀을 반죽해 판판하게 피고 위에 온갖 채소와 고기를 올렸다. 가지와 빠지지 않는 양파, 감자, 파, 후추로 간을 한 소시지, 얇게 자른 고기와 햄, 피망과 올리브를 올리고 위에 올해 잘게 갈아 저장했던 토마토를 얹었다. 후추와 소금을 뿌리고 화덕에 구워 냈다. 처음보는 요리였지만 맛이 썩 괜찮았다. 
   히나타는 어제 먹었던 그 얇은 빵을 생각하며 흥얼거렸다. 와카토시는 그러고 보면 참 많은 걸 알았다. 가끔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을 몰라 놀라기도 하지만 적어도 히나타가 알기에는 와카토시는 훨씬 대단한 걸 알고 공부한 사람이었다. 마치 어제 먹었던 토마토를 올린 얇은 빵처럼. 


   “와카토시 님은 그러고보니 어디서 그렇게 고기를 가져오는 걸까.”


   오후일을 하러 부엌으로 가는 길은 좀 싸늘했다. 옷깃을 최대한 여미며 히나타는 문득 의문이 들었다. 와카토시 님은 그래서 어디서 그렇게 고기를 가져오는 건데?
   기사들이 사냥을 허락받았다고 해도 육류는 보통 엄격히 통제된다. 가축을 키워 고기를 얻는 데에는 상당히 많은 양의 사료가 들어가니 아주 귀했다. 아, 물론 평민이 먹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매일은 아니지. 무엇보다 와카토시가 가져온 고기에는 새도 있었고 사슴고기나 멧돼지 고기가 섞여 있긴 했으나 대부분 소고기와 돼지고기였다. 저가 여전히 유키가오카의 농노로 남아 있다면 평생 입에도 못 댈 가축화 된 아주 귀한 고기 말이다. 시라토리자와가 아무리 풍족하다 하더라도 기사가 매일같이 구할 수 있는 식재료란 말인가. 
   히나타의 걸음이 점점 느려 졌다.  


   “히나타! 너 이 자식, 어디서 땡땡이를 치고 있어!”
   “아.”


   복도를 꺾자 보이는 얼굴에 히나타가 파드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보다 겨우 서너 살 많은 성의 하인이었고 최근 히나타를 아주 집요하게 괴롭히는 주동자였다.


   “지금 막 식사를 끝냈어요…,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는 중이었고요.”


   히나타는 나름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점심에 때를 맞춰 식사를 하지 못한 것은 어린 하인이 저에게 말도 안 되는 일감을 몰아줬기 때문이다. 겨우 일을 끝내고 가니 남은 음식이 거의 없어 빵 몇 개로 배를 채우고 겨우 걸음을 옮긴 참이었다. 근래 너무 잘 먹어서 그런가, 겨우 한 끼 부실하게 먹었다고 배가 고팠다. 그럼에도 이 모든 말을 할 수 없는 히나타는 필사적으로 변명했지만 아침에 제가 자신의 업무까지 밀어 둔 것을 잊어버린 건지 하인은 얼굴이 붉어진 채 씩씩대고 있었다. 


   “너, 농노주제에 성에 기어들어 오더니 이제 기생충처럼 붙어먹으려고 해?!”


   하인은 화가 많이 나 보인다. 히나타가 단순히 늦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어디서 혼이 난 것 같았다. 갓 들어온 히나타가 보기에도 하인은 부엌일을 하기에는 손이 좀 야무지지 못했으니까. 괜히 불똥이 튄 것 같아 불만스러워지는 표정을 애써 감췄다. 


   “죄송해요.”


   결국 할 말은 있지 않은 잘못을 비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평소라면 빈정거리며 일이나 미뤘을 법한 하인은 씩씩거리며 점점 히나타에게 다가왔다. 
   오랜 경험에서 나온 직감이랄까. 가장 낮은 신분의 그룹 안에 히나타는 유난히 나이가 어렸다. 발이 좀 빨랐지만 못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타고났기 때문인지 체격 자체는 크지 않아 그 뿐이었다. 산으로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가는 농노들의 아이들 안에서도 히나타의 위치는 가장 아래였다. 오래도록 구르다 온 경험은 지금 저 하인이 저를 때리러 온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알아도 피하지 못하지만.’
 

   괜히 피했다가 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손이 위로 번쩍 들리는 걸 마지막으로 히나타는 눈을 꼭 감았다. 보면서 맞는 거랑 보지 않으면서 맞는 거랑 또 느낌이 다르다고.


   “…?”


   제 따귀를 후려치는 강렬한 감각이 없었다. 오히려 사방이 조용했다. 느릿하게 어디서 새가 우는 소리만 났다. 그래서 히나타는 눈을 슬그머니 떴다.


   “어…, 와, 와카토시 님….”


   올라간 하인의 팔은 훨씬 단단한 손이 잡고 있었다. 아주 깊고 늪과 같은 머리카락을 한 이 훤칠한 체격의 남자를 히나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저와 함께 그동안 밥을 먹어준 와카토시였다. 팔을 잡힌 하인의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부들거렸다. 저에게 위압적이고 공격적이던 모습이 온데간데없었다. 


   “영, 영주 님!”


   팔이 풀리자 하인은 넙죽 엎드렸다. 영주의 소문은 파다했다. 공명정대하고 반칙이 없으신 분이라고. 멍하니 아래에 엎어진 하인을 보던 히나타가 서서히 고개를 올렸다. 
   다시 봐도 역시 제가 알던 와카토시였다. 와카토시 님.
   우물거리는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다시 부르려고 한 순간 히나타와 와카토시의 눈이 마주쳤다. 그러니 놀랍게도 말문이 턱 막히는 것 아닌가. 의중을 알 수 없는 눈을 히나타가 먼저 피했다. 와카토시가 정말 영주라면 지금이라도 허물없이 군 것에 대해 납작 엎드리고 잘못을 빌어야 하는게 맞지만 히나타는 입술만 꾹 깨물었다. 건방지다 성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는데.
   우시지마 와카토시는 그런 건방진 히나타를 호통치는 것 대신 하인을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돌아가라. 그리고 내가 부를 때까지 네 방에서 대기해.”


   화났나. 목소리가 차갑다. 그 전까지 저와 밥을 해먹던 남자의 목소리라고 생각도 못할 정도로. 히나타는 지금이라도 넙죽 엎드려 빌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간을 제대로 못 맞추던 남자였는데. 어제까지만 해도 남자는 칼을 잘 다루지 못하던 저를 대신해 감자를 대신 깎아줬고, 장작을 펴주었고, 뜨거운 걸 잘 먹지 못했고, 어제까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너를.”


   어제까지만 해도 누구보다 히나타에게 상냥한 남자였다. 저에게 어디서 가져온 젤리 하나를 슬그머니 쥐여주는. 히나타는 그 젤리의 양만큼 용기를 내 시선을 들었다. 
   상상했던 차갑게 얼어붙은 얼굴은 없었다. 당황한 감정이 역력했다.  


   “너를 속일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저 너와 평범한 이야기를 하며 밥을 해먹는 게 행복해서. 그리고 따로 말을 할 생각이었는데 기회가 없어서,”
   “와카토시 님!”


   우시지마는 되는대로 마구 말하다 깜짝 놀랐다. 히나타가 불현듯 제 말을 끊고 소리를 질러서다. 처음 뒷걸음질 쳐본 우시지마는 그제서야 히나타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었다. 히나타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평생 남에게 굽히고 들어간 적이 없는 우시지마지만 지금 당장 무릎을 꿇고 히나타에게 그동안 고의는 아니었지만 거짓말을 하게 돼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평민에게 무릎이라니, 기함 할 일이지만 우시지마에게 중요한 건 지금 그 알량한 자존심 따위가 아니었다. 뜨거운 것을 먹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다정하게 웃으며 끓인 차를 식혀주는 다정한 사람이 곧 사라질 수 있다는 거다. 
   히나타는 더듬더듬 우시지마의 손을 잡아왔다. 커다란 손은 투박했고, 감싸듯 그 손을 잡은 작은 두 손은 굳은살이 많았다. 두 사람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손. 긴장한 우시지마를 달래듯 몇 번 토닥거리던 히나타의 목소리가 떨린다. 


   “오늘…, 감으로 차가운 간식을 만들기로 했잖아요.”


   잔뜩 익기 시작한 감을 따 차갑게 얼려 달콤한 꿀과 연유에 담근 후 떠먹겠다는 약속이 있었다. 달콤한 걸 좋아하는 히나타가 무척이나 기대하던 날이었다. 우시지마의 커다란 손을 도닥이는 작은 손은 잔뜩 긴장해 뜨거웠지만 평소와 같이 무척이나 상냥했다. 


   “꿀하고 연유를 타 주신다고 해서…,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었어요.”


   거짓말에 대한 아주 상냥한 용서였다. 우시지마는 히나타의 손을 마주잡았다. 


   “올해는…, 그러니까, 풍년이 들었다. 시라토리자와는 풍성하고 신선한 식재료가 나는 곳이지. 쌀로 만든 달콤하고 차가운 간식도 있다. 과일들도 당도가 높아 오래도록 저장해도 쉽게 상하는 법이 없지. 건강한 채소들도 난다. 가축은 행복하게 키워진다. 너와.”


   우시지마의 손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히나타도 마찬가지였다. 


   “너와 계속해서 나누고 싶다.”


   오후의 햇살이 창문을 타고 느릿하게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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